누군가 집 앞 오래된 나무를 예쁘게 가지치기 해놓았다. 동네 길가에 있는 나무들 모두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시티에서 봄을 맞아 다녀간 모양이다. 이런 수고까지 해주다니 대견하기만 하다.
그런데 길가에서 집 쪽으로 많이 들어와있는 다른 나무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집주인의 몫인가 보다. 비교가 되니 흉해 보인다. 이 참에 마음먹고 잔디 위를 길게 드리웠던 굵은 가지들을 모두 베었다. 큰 그늘 아래의 잔디는 잘 자라지 못할뿐더러 이 맘 때쯤이면 빈자리에 듬성듬성 이끼마저 끼곤 한다. 올해는 가지를 많이 쳤으니 잔디가 햇빛을 골고루 받아서 기를 펴고 온전히 푸르러지기를 기대해 본다. 잔디는 설사 여름날 뜨거운 햇빛에 잠깐 마르는 한이 있더라도 양지에서 자라야 결국 튼튼해지기 마련이다.
날씨가 좋아서 오래간만에 팬쇼 저수지 둘레를 한 바퀴 걸었다. 트레일 길에는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다. 3월에는 내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과도 제법 마주쳤다. 며칠 동안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질척한 곳도 여럿 있었다. 땅이 마르고 나무가 잎으로 뒤덮이면 길이 훨씬 쾌적하고 걷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길 아래로는 봄의 대지를 가득 적셨던 비가 뿌연 강물이 되어 넘실대고 있었다.
묵묵히 아래만 보고 걷다가 갑자기 뱀을 마주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릴 때 동네 뒷산 산딸기 밭 초입에서 마주쳤던,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나를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리던 그 커다란 뱀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이후로 뱀은 늘 나에게 트라우마였었다. 그런데 오늘 이놈은 덩치도 작고, 스치며 지나가도 미동조차 없다. 나무막대를 던져보았지만 혀만 날름댈 뿐 도망을 가지 않는다. 사람을 마주치고도 태평하기만 하다.
트레일이 20km 남짓해서 장기간의 도보여행을 연습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스페인에는 ‘까미노’라고 불리는 순례의 길이 있다. 총 800km라고 하는데 보통 40일동안 매일 20km를 걸어 완주한다고 한다. 서울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와 비슷하다. 요즘은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삶에 지쳤거나, 새로 뭔가를 시작하거나, 아니면 그냥 마음을 하나하나 비워내고 싶을 때 한번쯤은 찾는 모양이다. 나를 비롯해서 주위 많은 사람들의 인생 버켓리스트에 올라 있다. 요새 부쩍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많아진 탓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그냥 “내던져짐”이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존재는 여기 낯선 길에 내팽개쳐져 있다. 누가 나를 던졌는지, 왜 그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고달프게 걷고 있다. 그 끝에는 “No exit”이라는 푯말이 서 있을 뿐이다. 통하지 않는 길은 관리되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가 결국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걷다가 뱀이라도 나타나는 날에는 가던 발길을 돌려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한다.
만약 삶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삶은 하나의 여정이 된다. 그 목적지에 대한 그림이 생생할수록 인생은 순례 길에 가깝다. 될수록 가벼운 배낭을 매고 가야 한다. 그리고 뱀이 나온다 해서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인생직진이다.
뱀에 대한 나의 공포는 우리 집 잔디 위에서 무질서하게 커버린 오래된 나무와 닮았다. 길을 걷다가 뱀을 만나듯이, 순례의 길을 가다 보면 내 마음 속에는 왜곡된 공포심에서 비롯된 커다란 나무들이 종류별로 무질서하게 자라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아래에는 역시 여러 잡초들과 이끼로 가득하다. 나의 타고난 기질과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내 마음 밭에는 고유의 공포심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자기애’에서 비롯된 과도한 방어기제 때문에 커다란 나무들로 자라나 있다. 어린 시절 가난의 공포로 커서는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기도 하고, 애정결핍 속에 자랐기 때문인지 나 자신을 늘 우주의 중심에 놓고 관계를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비록 습득된 공포라 해도 뱀을 보고 지금 놀라지 않을 수 없듯이, 이미 깊은 뿌리와 함께 커다랗게 자라버린 나무는 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뿌리를 뽑을 만한 힘도 없고 통째로 베어버릴 기술도 없다. 다만 가지치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정처 없는 길이 아니라 순례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돌렸다면 정처 없던 생활패턴에서 새로운 희망과 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의무와 새로운 형식이 담긴 새로운 생활습관을 짊어져야 한다. 시티가 밭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나무를 가지치기 해주듯 처음에는 이런 변화된 삶의 형식과 의무가 마음 밭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들을 가지치기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형식과 의무는 얼마 가지 않아서 메마른 사막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집 쪽으로 깊은 곳에 자리한 나무의 가지를 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일은 고역이지만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고, 톱질도 해야 하고, 자른 가지들을 처리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늘 많던 곳에도 빛이 가득히 쏟아지는 때가 온다.
순례의 길에서는 빛을 받다가도 어둡고 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길목이 있다.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서 엄마의 손을 놓친 것 같은 두려움, 자전거를 타던 중에 아빠가 뒤에서 잡고 있던 손을 갑자기 놓아버렸을 때의 두려움 같은 것이 찾아온다. 여린 부리로 계란을 깨고 나오려는 병아리 모습이 안쓰러워 주인이 껍질을 대신 깨주면, 그 병아리는 생명력이 약해져서 반드시 죽고 만다. 그래서 이 터널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어느 날 절벽에서 아빠가 나를 밀어버린다. 그러나 추락하다 보니 내가 새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날개가 있으니 나는 추락하는 것이다. 날개가 없었다면 그리고 때가 성숙하지 않았다면 아빠 새는 결코 나를 절벽에서 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추락하는 모든 생명에게는 날개가 있다. 내던져지고 팽개쳐졌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이 이것을 믿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완주하는 데에 6시간이 넘게 걸렸다. 날이 저물어 간다. 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