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중에 막내가 세 번이나 우리 방을 찾았다.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비몽사몽 간에 엄마가 침대 보를 봐주기도 하고 온도를 다시 세팅해보기도 했으나 결국 나와 방을 바꾸어 잤다. 그러고 보니 6월도 중순이 다되어 가는데도 시원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 실내 온도조절기가 ‘난방’ 모드로 세팅이 되어 있었다. 막상 아침이 되니 다시 서늘해졌다. 아침 햇살에 더욱 짙어 보이는 녹음의 그늘 사이로 바람은 선선하기만 하다. 잔디에게는 행운이지만 가을에 수확될 열매에게는 불행이지 싶다.
며칠 전 TV를 보다가 어떤 연예인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식 가진 아버지 연기는 자신이 없어 늘 배역을 거절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는 오십이 다 되어 가지만 그는 아직 싱글이었다. 앞으로도 자식이 잘 되어 느끼는 행복 같은 것은 아마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처지에서도 그런 아쉬움이 있다니 겉만 보고 누구를 부러워할 일은 아닌가 보다. 문득 밤새 우리 부부를 괴롭힌 막내의 존재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저 사람은 금전이 아쉽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언제든 먹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여행할 시간과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것 조차 더 이상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한끼 식사는 무한한 기쁨을 주지만, 원하기만 하면 늘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급 호텔의 요리조차도 행복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감이 주는 행복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 공허해지는 시점이 온다는 것을 누구나 직감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성은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라 외치며 지금 현재에 만족하고 감사하라고 타이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은 갈 데까지 한번 가보기를, 그래서 남들처럼 나도 누려보기를 애타게 갈망한다.
화려한 삶 이면에도 우리가 모르는 고역이나 아픈 사연들이 있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서커스 코끼리가 조련사의 말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경탄하지만 사실 그 코끼리는 어린 시절 아팠던 기억 때문에 채찍 소리에 깜짝 놀라는 것이라고 한다. 조련사는 코끼리가 어릴 때 발 밑에 전기가 흐르도록 해 놓고 채찍 소리를 낼 때마다 전기가 흐르게 하여 코끼리를 길들인다. 그래서 코끼리는 커서도 그 채찍 소리를 들으면, 지금은 전혀 전기 때문에 아프지 않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이 과거의 아픈 기억에 반응을 하는 것이다.
아픔도 숨어있지만 사실 진정한 행복 역시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 언어에도 이런 암시가 있다. 그냥 보이는 것만 본다면 look하는 것이고, 보이는 것 너머에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할 때 see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때는 listen하는 것이지만, 들리는 것 안에 담겨있는 메세지를 이해할 때 hear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해지려면 보이고 들리는 막연한 것들 안에 숨어있는 실체를, 마치 숨바꼭질 놀이하며 숨어있는 내 친구를 찾듯이 애써 노력하여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행복에 관련된 가장 원초적인 두 감정은 사랑과 두려움인데 이들 역시 마음에 숨어있다. 하나는 지름길이요, 다른 하나는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빛이요 두려움은 어두움이다. 사랑은 캄캄한 시골 동네 어느 집 방에 켜진 작은 촛불 같아서 찾기가 어렵고, 두려움은 마을을 온통 뒤덮은 어두움이라 원래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일부러 숨어있기를 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과 신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과 신뢰만이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된다. 이 눈과 귀를 통해 우리는 어둡고 캄캄한 숲을 지나 작은 초가집에 숨어 있는 사랑을 찾아갈 수 있다.
생물학적 눈에 주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커다란 실체를 가리키는 하나의 실마리, 혹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마치 바다에서 빙산의 일각을 만날 때 저 작은 한 조각 아래 거대한 빙산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실마리를 보고도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신뢰할 때 사랑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사랑은 캄캄한 밤의 촛불이 아니라, 세상 만물을 눈부실 정도로 가득 채우고 있는 대낮의 해와도 같다는 것을 보게(see)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에는, 사랑은 오직 믿음과 신뢰의 눈으로만 찾을 수 있도록 늘 커튼 뒤에 숨어 있고 머리카락만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보게(look) 되는, 순도가 천차만별인 그런 사랑의 흔적들은 아마도 더 큰 사랑의 작은 일각들이 아닐까 한다. 지구라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태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미지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우리는 그에 맞추어 양수 속을 춤추듯 헤엄치고 있다. 태아가 실제로 태어나서 자라고, 언어를 배우고, 마음이 성숙하고 나서야 그 미지의 달콤함은 내 부모가 뱃속의 태아였던 나에게 속삭인 사랑의 언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악마는 늘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네가 신이라면 이 돌을 특급요리로 바꿔보라, 63빌딩에서 떨어져도 박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봐라, 저 맨하탄에 있는 휘황찬란한 모든 빌딩의 건물주가 되어 봐라 요구한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사랑 자체는 유형 무형의 피조물 안에 자꾸 숨으려 할 뿐이다. 나는 그저 바다를 항해하다가 가끔 가물에 콩 나듯이 만나는 빙산의 일각을 보고 그 아래 있는 더 큰 빙산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자식이 측은하게 보이던 이 마음 역시 내가 아닌, 나보다 큰 누군가의 작은 속삭임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