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신자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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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열 다섯 가구 남짓으로 구성된 반이 한 달에 한번씩 이런 모임을 번갈아가며 가지고 있다. 오늘은 우리 집 차례였는데 두 세 가족만이 방문했다. 모임에서는 성경도 읽고 관련된 내용을 나누고 기도를 하고 성가를 같이 부르기도 한다. 후반부에는 공지사항과 함께 다가올 성당 행사에서 우리 반이 분담해야할 역할을 의논하기도 하고 건의사항도 수렴하고 그러다가 서로 살아가는 얘기도 나누게 된다. 한 때는, 할당 받은 내용을 잘 치르는 데에만 모임의 초점이 있는 것 같아서 참석하는 것이 마치 노동처럼 느껴진 적도 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전례(전해 내려오는 종교적 예식행위)와 함께 이런 소모임은 신앙적인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석률은 갈수록 저조해진다.

예전에는 가톨릭 신앙 자체가 한국에서는 특이한 소수의 문화였고 일반 사회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과는 많이 달라서 양반과 노비,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남자와 여자, 사제와 평신도 등의 구별은 오히려 사소해 보이곤 했었다. 유별난 라틴어 예식과 독특한 생활습관이 계층과 신분에 상관 없이 강력한 정체성과 함께 끈끈한 결속을 가져다 주었고, 그래서 모두가 같은 방에 모여 동일한 세계관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가톨릭은 대중화됨과 동시에 그 인구도 늘게 되었다. 이제 교회 내에서도, 사회 경제적 환경, 개인적인 관심사, 연령 등의 차이가 신앙 자체보다 더 강력한 색깔을 띠게 되고 따라서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곤 한다.

성당은 더 이상 사회의 불합리로부터의 어떤 ‘해방구’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일반 사회의 작은 축소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라고 불리는 것도 어색하다. 그냥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예식과 행사가 자연스럽게 삶의 습관이 되었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졌고,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들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 동호회처럼 사회생활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정보를 교환하고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 지역주민들의 모임 같아 보이는 것이다.

만약 성당이 내가 좋아서 즐겨 참여하는 어느 동호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면, 혹은 내가 자라서 정들어버린 어느 시골의 고향 마을과 비슷한 것이라면, 내게 더 좋은 취미가 생겼을 때는, 혹은 성장해서 좀 더 큰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는 굳이 떠나도 크게 상관없는 곳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의 기존 가톨릭 인구는 급속도로 이탈하고 있다고 한다. 서구문명을 따라온 지금까지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한국에서도 조만간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물론 낙태나 동성애나 여자의 사제직분 문제 등 이미 주위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이슈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공존하지 못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 주변적인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떠날 때는 머리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사에 따르면(주1) 가톨릭이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주로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가톨릭 사람들은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전 신자들이 참여하는 전례와 행사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때문에 개개인들에게 소홀하다. 둘째, 사제의 강론이 부실하다고 느낀다. 사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중재자 역할이다. 그래서 하늘의 계시를 음미할 줄 알아야 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언어적인 역량으로 그 둘을 연결해주어야 한다. 세 가지에 모두에 능한 사람이 드물다. 셋째, 떠난 사람들에게 비정하다. 일반 회사들도 서비스를 이용했다가 끊으면 전화나 이메일이나 편지를 통해 연락이 온다. 무슨 불만으로 그랬는지, 새 상품이 있는데 올해에는 이용할 생각은 없는지, 잘 지내는지 등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성당에 발을 끊으면 1년이 지나건 2년이 지나건 누구에게서도 전화 한 통 받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어쩌면 교회가 일반 사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전처럼, 어떤 사회 계층에 속하든 신앙이 주는 강력한 위로와 참 행복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반모임이 저마다의 사정이나 관심사에 비해 후순위로 밀린 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있는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럴 바에야 연령이나 관심사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다섯 가정 혹은 열명 정도로 헤쳐 모여서 군대의 소대처럼, 혹은 회사의 팀처럼, 혹은 대학교에서의 프로젝트 팀들처럼 반을 조직한다면 훨씬 소모임을 활성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꼭 조직을 어떻게 편제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은 늘 숨어있기 마련이고 소수만이 찾는 것이니 많은 군중이 떠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그러니, 소수와 군중의 경계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는 것으로 느낀다면 자신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교회 밖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어쩌면 우리는 앞에서 혹은 뒤에서 모두가 같은 동아줄을 붙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어떤 존재가 그 동아줄을 잡아당길 때 거기에 붙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줄기에 달린 고구마들처럼 줄줄이 당겨오지 않을까? 누구든 사랑을 잃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주2)

근대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소외 받던 개인에게 집중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성당도 이제는, 모든 역량을 전례와 행사에만 쏟지 말고 각 개인들이 종교 본연이 주는 행복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개인의 마음이 잡초가 무성한 잔디밭과 같다면 아무리 잔디 씨를 공중에 뿌려도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3)

(주1) 미국 뉴저지 주 Trenton 교구의 David O’Connell 주교의 의뢰로 교구 내 가톨릭을 떠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로서, 2012년 잡지 ‘America’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어쩌면 마음먹기에 따라 시정할 수도 있는 이슈라고 생각된다.

(주2) 땅에 숨어있던 크고 작은 고구마들이 줄기에 딸려오는 모습은,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사제였던 Balthazar가 했던 말 중에 “We may reasonably hope that all people will be saved.”라는 말을 바탕으로 상상해 본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잣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구원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희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발타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3) LA 대교구의 Barron 주교에 따르면, 교회의 가장 큰 권력(power)는 성직자 혹은 교권 조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배출된 “성인(saint)”에게서 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성인이 된다. 사제들의 모든 조직, 행해지는 모든 전례, 모든 교리, 모든 전통, 모든 행사는 신자들을 “성인(saint)”로 만들기 위해 오직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 성화’가 교회가 존재하는 최고의 목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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