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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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학교에서 흙이 있는 작은 화분에 오크나무의 모종을 담아왔다. 한 뼘 정도 크기의 가녀린 줄기에 의외로 큼직한 잎이 두 개 달려 있었다. 한동안 거실의 커피 테이블 위에 놓아 두었지만 영원히 거기에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절기상으로 식목일쯤 되는 빅토리아 데이에 막내랑 같이 양지바른 곳에 심어 주었다. 화분에 담긴 흙을 그대로 함께 넣어서 정성스럽게 물도 자주 적셔주었지만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잎이 시들어져 가더니 결국 두 개의 잎은 차례로 말라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그 나무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두어 달이 지난 오늘 잔디를 깎다가 그 모종에 문득 손가락 만한 새 잎이 파릇하게 돋아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세월을 버티고는 그 가녀린 가지에서 땡볕아래 새로운 잎을 돋아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잎의 생김새가 전과 달랐다. 집 안에 있을 때보다 크기가 작아졌지만 싱싱한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초록빛도 훨씬 강해졌다. 야생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잎으로 재무장을 한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게 성장한 상태를 먼저 염두하고 있어야만 현재의 생명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오크는 산과 들에서 커다란 나무로 자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집 안에서 잘 적응한다고 해서 실내에 방치할 일은 아닌 것이다. 도토리 역시 나무로 자랄 것을 모르고 바라본다면 그냥 묵을 만드는 식재료 정도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뱃속의 아기는 미래의 성숙해진 몸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양수에 편안하게 잠겨있는 아기에게 왜 굳이 코와 발이 있는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의사 역시 환자를 치료하려면 먼저 건강한 사람의 몸을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도록 태어났을까? 완벽하고 건강하게 자란 모습, 플라톤이 사람의 ‘이데아’라고 부를 만한 상태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와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무신론자였던 까뮈는 흥미롭게도 ‘페스트’라는 작품에서 의사인 리외(Rieux)라는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는 성인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외는 ‘인생의 의미는 성인이 되는 데에 있어.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거룩함을 믿어. 문제는 신이 없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하고 말한다. 그리고 리외는 고립된 마을에서 페스트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성인이 아닌 사람이 성인을 알기란 쉽지 않다. 거룩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면, 원래 거룩함이란 공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에 다 들어가지 않는 것, 그래서 부분으로 쪼개어지지 않는 것은 그 실체를 과학적으로 알기 힘든 법이다. ‘사랑’도 그렇고, ‘나’라는 존재 자체도 그렇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신비한 것이다.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 정체를 모두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신비(Misterium)’라고 부른다.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도 빛나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한다. 70년대 유신시대를 지나온 어느 사람의 목격담이다.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로 공안검사의 취조실 밖에서 총을 찬 헌병들의 감시하에 그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대기실 밖에는 군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고 방은 억눌리고 두려운 분위기로 질식할 것 같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나비 한 마리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나비는 빛이 스미는 창문에 부딪히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애처롭게 파닥이다가 바닥에 쓰러지곤 했다. 그 방에 있던 모두가 그 나비를 보았지만 공포로 가득한 분위기에 눌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때 어떤 이가 조용히 일어서서 천천히 나비가 있는 곳으로 가로질러 갔다. 모두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그는 수갑을 찬 손으로 말없이 나비를 집고 다시 창문 곁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헌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나비를 창 밖으로 내보내주더라는 것이었다. 거룩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30년을 훨씬 지난 지금 이 사람의 평판은 반반이다. 그도 사실은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한 때 치졸한 속물이었던 경우마저 드물지 않다. 성인은 전 생애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일상에서 거룩함을 (자주) 체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른다.

칼 라너는 ‘일상’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즉,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그래서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침묵을 지킬 때, 그 침묵으로 나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남들은 내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도 남을 용서할 때,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스스로도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할 때, 순전히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고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그런 결단을 혼자서 내릴 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의 죽음 같고 나의 절대적 부정 같아 보이고 허무를 향해 부르짖고 있는 듯한데도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거룩함을 체험한다고 했다.

아직 거룩함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앞선 성인들의 삶과 증언을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이상적이고 건강한 모습, 즉 성인들을 보아야 한다 (성인들의 전 생애가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Marcel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을 알려면 성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마치 배탈이 나지 않는 선에서 배터지게 맛있는 것들을 마구 입에 넣는 어린아이, 혹은 이 정도면 설마 지옥에 가지는 않겠지 하는 최소한의 의무만 채우고는 산으로 들로 신나게 즐기러 다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삶의 의미와 목표는 단지 배탈이 나지 않는 것에 있는 것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에 있는 것도 될 수 없음을 안다. 삶의 의미와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느껴야 할 유일한 슬픔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슬픔’이라고 한다. 최소한, 나에게 주어진 엽전 한도 내에서 그 길을 최대한 멀리 걸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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