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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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도시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큰 아이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아빠는 결혼하기 전에 엄마에 대한 마음이 어땠어요? 만날 때마다 설렜어요?” 아들은 같은 남자로서 내가 자기 엄마와 결혼할 때의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확신 같은 것이 있었나요?”

“물론 확신이 있었지. 수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엄마를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클 때 ‘여사친’들이 없었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연애를 할 무렵에는 치마만 둘러도 모두 잠재적 애인들이었다. 물건도 일단 사용해봐야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게 되고 더 좋은 물건을 볼 수 있는 눈이 길러지듯이 여자들도 사귀어 보는 과정에서 어떤 여자가 자기에게 적합한 사람인지 점점 알게 된다. 완벽한 여자는 없다. 그냥 자기에게 유난히 매력적인 여자가 있을 뿐이다. 상대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겁내지 말고 손도 잡아보고 키스도 해 봐라. 노를 젓다 보면 순풍이 돛을 밀어줄 수도 있다. 결혼은 둘이 좋아한다고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도와주어야 맺어진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해준 것 같다. 벌써 아들이 진지한 사랑을 할 나이가 되었다. 어쩌면 5년 안에 50대 중반의 나이에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만 하다. 아내는 더 황당할 것 같다. 50살 초반에 할머니라……

사랑은 도대체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잘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단테’는 9살 때 자기보다 한 살 어린 어느 소녀를 우연히 보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다음 우연히 거리에서 이 여인을 다시 마주친다. 이 여인의 미모는 누가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plain Jane이었다. 눈 인사만 나눴다. 단 두 번의 만남. 그 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젊은 유부녀로 요절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다. 왜 그렇게 반했는지, 왜 평생 동안 그다지도 절절했는지 자신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도 알 수 없었던 의아한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나 상대방의 매력 포인트를 자세히 열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불안할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그 이유는 대개 사라지기 마련이거나, 혹은 바로 그 매력 포인트였던 것 때문에 오히려 불화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사랑은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 신비한지도 모른다. 아내는 자기 친구에게 어릴 때 알던 남자를 소개시켜 준 적 있다. 그에게는 코 밑에 큰 점이 있었는데, 아내의 친구는 그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서 지금까지도 그 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들은 그 사람을 보면 그 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신경이 쓰이는데, 아내의 친구는 그것이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신기해하며 웃는다.

요즘은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는 모양이다. 결혼이 늦어질수록 상대방에게서 ‘사랑할 만한 이유들’을 찾게 된다. 자신의 타고난 심성과 굳어진 습성들, 다른 가족들과의 케미 등 이미 짜여져 있는 모자이크에 딱 맞는 인연의 조각을 찾으려 하니 일이 쉽지 않다. 힘겹게 노를 저어가기는 하지만 특히 미혼의 이민자에게 캐나다는 순풍을 만나기가 어려운 곳이다.

혼자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결국 그것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리고 일부러 그런 삶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자연은 사람을 혼자 살도록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독신의 삶은 자연을 거슬러 가는 힘겨운 여정이다. 고독이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을 계속 다독거려야 하므로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만큼 자연은 결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은 문화적 현상이지만 삼라만상의 원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결혼을 ‘성사(성스러운 실체를 눈에 보이도록 해주는 현실적 사건)’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음양이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것, 혹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본성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우주적 진실을 결혼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사람만 보더라도 서로 본성이 다른, 땅의 흙과 신의 숨결이 결혼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흙)과 천사(영, spirit)의 단순한 동거가 아니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둘이 분리되는 즉시 죽어버리는 존재가 된다. 영혼과 육신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두 가지 양상일 뿐이다. 한편, 창세기에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신과 우주(그 정점은 사람)의 결혼식에 비유된다.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은 혼인잔치 날과도 같다. 안식일(Sabbath)의 어원은 칠(seven)이고 ‘칠’은 ‘(혼인할 때의) 서약(covenant oath)’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과 만물이 하나가 된 결정체가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된 예수라는 존재이다. 그는 첫 기적을 혼인식에서 행했고, 자신을 신랑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대미(요한 계시록의 끝)는 하늘과 땅의 결혼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리스도교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결혼, 결혼, 결혼이다. 그래서 남녀간의 결혼도 우주적 상징이 된다.

바깥 세계에서 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나’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을 파악고자 한 것이 근대의 시작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 개개인들은 우주적 미아가 되어버린 것 같다. 굴종의 삶을 피하고 인간의 자존감을 강조하다 보니 모두가 미혼의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믿을만한 배우자가 늘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쉽게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노년의 모습은 던져진 인생이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는 끝자락이다. 갑자기 궤도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없다. 오랜 관성 끝에 다다르는 열매와도 같다. 살아온 궤적에 따라, 습성이 오히려 딱딱해지고 사고가 더욱 완고해질 뿐, 죽음에 한층 더 다가와 있다는 현실이 사람을 갑자기 현명하게 바꾸지는 않는다. 노인이 되어서도 배우자와 산책할 때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사이, 단둘이 여행을 가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지금 ‘곧바로’ 배우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친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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