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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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노트르담’이라 불리는 건축물이나 도로가 자주 눈에 띈다. ‘담(dame)’은 여성에 대한 존칭(영어의 lady)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마담(ma dame)’은 my lady, ‘노트르담(Notre Dame)’은 ‘Our Lady’라는 뜻이다. 그런데 노트르담은 전통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해왔다. 우리 나라 말로는 ‘우리 성모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교 때 개신교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을 했다. 당시에는 마리아가 그저 오래 전 중동지방 어느 외진 시골의 수수한 아낙네 정도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 평범한 여인으로서 우연히 예수라는 존재를 낳을 ‘대리모(?)’로 선택 받은 행운의 여인이랄까? 기록된 복음서를 살펴도 마리아는 보잘것없는 인물로 보인다. 베드로에 대한 언급은 150번을 넘지만 그녀에 대한 언급은 간접적인 것을 포함하더라 10번이 되지 않는다. 당시 양피지의 가격이나 필사의 수고로움을 감안한다면 꼭 필요하고 중요한 내용 위주로 기록을 남겼을 터인데, 언급이 적다는 사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스스로도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시는 듯한 장면이 두세 번(12살 때, 가나 혼인잔치 때,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있다. 아무리 어머니이지만 역시 자신과는 레벨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화들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그런데도, 천오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독교인들은 마리아를 ‘노트르담’, 즉 ‘우리의 거룩하신 여사님’이라고 한결같이 불러왔다. 또한 의미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그 분은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종교개혁을 거치고도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까지도 성모 마리아를 성인들 중에서 가장 고결한 위치에 놓는다. 나아가 보통 사람에게는 황당하게 보이는 믿음들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피조물에 불과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느니, 숫처녀로서 예수를 낳았을 뿐 아니라 이후로도 ‘평생 동안 동정’이었다느니,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었다’느니, 그 아들처럼 ‘승천했다’느니, 구원을 위한 유일한 중개자가 따로 있는데도 ‘인류의 중개자 역할을 함께 한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모두 성경에 기록된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진리는 대개 단순한 모양을 취한다. 중앙 건물이 있는데 왜 굳이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속건물이 필요하며, 확실한 지름길이 있는데 왜 굳이 둘러가야 하는가? 그래서 종교개혁을 통해 부속건물은 허물고 에둘러가는 길은 폐쇄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귀한 보물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큰 길에 있지 않고 외진 밭에 숨어있는 법이다. 그 밭을 찾고 일구려 애쓰는 자만이 그 보물을 발견하게 되지만 세상이라는 밭은 너무도 넓다. 용도를 알 수 없던 그 부속건물에는 어쩌면 그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갈 수 있는 약도와 필요한 나침반 같은 것이 먼지에 쌓여있었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보물지도들이 그렇듯이 약도는 숨어있고 설사 눈에 띄더라도 아이들의 그림처럼 유치해 보이므로 방치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그 부속건물 안의 아이템들은 실제 보물 자체 못지 않게 귀한 보물일 것이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흠모는 예배(worship)가 아니라 공경(honor)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흠모마저 주저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마도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는 만큼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마음에 들어선 우상들, 예를 들면 money, sex, power에 대한 열정들이 대부분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성모의 기록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분의 삶은 가난과 순결과 겸손으로 일관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 대한 흠모는 오히려 이런 우상들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마리아를 흠모할수록 탐욕의 스캔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97%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3%만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마치 내 어머니를 전심전력으로 100% 사랑하면 내 아버지나 형제자매, 나의 자녀와 친구를 사랑할 여력이 전혀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마치 ‘포토샵’의 그림처럼 수 많은 층(layer)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층에서 나는 누군가를 100% 사랑해도 다른 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깊은 관련을 가지고 다른 층의 사랑을 증폭시킨다. 그 모든 층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짐작한다. 마리아에 대한 흠모는 그 아들의 목소리를 더 잘 알아듣게 하는 보청기, 그 삶의 의미와 본질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돋보기, 누군가에게 그 향기를 더 잘 전할 수 있는 확성기 역할을 하는 것일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열 서넛이 된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수태하리라 예고했는데 맨 처음 인사말로 건넨 말이 ‘아베 마리아(Ave Maria)’였다. 영어로는 ‘Hail Mary’이고 우리 말로는 ‘마리아야 기뻐하여라’ 정도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존재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다. 착하고 온화한 얼굴에다 등에 날개가 달린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한결같이 두렵고 위압적인 존재였다.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영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나타날 때마다 천사는 늘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안심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당연히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도 ‘기뻐하여라’ 하고 반말을 했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러나 영어의 ‘hail’에서 알 수 있듯이 천사가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에게 사용한 애초의 표현은 놀랍게도 ‘경의(reverence)’의 표현이었다. 존댓말이다. 이 ‘hail’은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12 제자들 중 하나가 ‘Lord’라고 부르던 자신의 스승에게 사용한 표현이기도 한다.

역사의 진보를 믿고 진화론에 익숙한 우리가 흔히 가지는 사고의 오류가 있다. 지난 시대는 지금 시대보다 더 무식하고 우둔하며 폭력적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사슴이 벽에 새겨진 원시 동굴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미개하고 폭력적인 원시인들의 집단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사슴을 추상적으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은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는 철의 장벽과도 같다. 아무리 원숭이 천만 명이 협력한다고 해도 단 하나의 사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 그림은 어쩌면 이미 온전한 도덕성과 인간성이 만개한 원시인들이 사냥이 어려운 겨울에 옹기종기 모여 벽에 사슴을 그려놓고 정답게 다트 놀이를 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인간이 천오백 년 가까이 어떤 믿음이 유지해 왔다면 거기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있을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좀 덜 교만해 보인다. 어쩌면 그 진실은, 그 고결한 사람을 가까이 했을 때 해독의 청량감이 전해지는 체험, 그래서 그 청량감이 삶과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라고 느끼게 되는 ‘원시적인’ 체험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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