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으로부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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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되어도 20도 초반이다. 추분을 많이 지나서 그런지 낮에 햇볕을 받는 시간도 짧아지고 덩달아 날씨도 선선해진다. 계절의 변화를 가져오는, 몇십억년 동안 한결같은 지축의 기울기. 그 보이지 않는 기울기가 조그만 달라졌어도 세상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일관성에 의지한 채, 그 기울기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으리라 믿으며 나는 안심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계절이 바뀌듯 한 사람이 다시 떠나갔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빛은 하나이되 프리즘을 통과하면 다양한 색깔로 나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특정한 색에 반응을 한다. 파란색을 접하고 그 냉정함에 굳어버리는가 하면, 빨간색을 대하고 따듯해지거나 노란색을 접하고 흥에 겨운 사람도 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에 해를 입어 숨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적외선이 주는 도움을 받고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았다고 감사해 하는 사람도 있다. 떠날 때 안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울며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 그냥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프리즘은 빛을 받아서 해석할 뿐 스스로 빛을 내뿜지는 않는다.

그는 성직자였다. (우리도 나름 그렇지만) 성직자는 특히나 ‘손가락’ 같은 역할을 한다. 달을 가리키는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손은 섬섬옥수 같이 아름답고 황홀해서 눈을 거기서 도저히 떼지 못한다. 어떤 손은 문둥병이 들어 손가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조차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어쩌면 팔찌나 반지 하나 없는, 개성은 없지만 수수하고 건강한 손이 사람들의 눈을 달로 향하게 하기에 가장 적합할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는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수려한 외모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을 수도 있고 발연기 때문에 관객에게 실망을 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배우는 (거울은 스스로를 닦아낼수록 빛을 더 잘 비추게 되듯) 자신의 색깔을 지울수록 관객에게 작품 속 인물을 더 잘 전달하게 될 것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자신을 비우고 작품 저자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려고 애쓰는 동안 어느 날 실제로 그 인물을 닮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손이 섬섬옥수이든 문둥병 걸린 손이든, 그 손가락을 보고 달을 볼지 아니면 손가락을 평가하는 데에만 몰두할지는 오로지 관객의 몫인 것 같다. 참고할 만한 사실은, 교회의 창립자인 예수께서 직접 뽑은 12명 중에서도 1명(8%)은 손이 문드러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1명이 불러일으킨 고통으로 인해 창립자의 과업이 더욱 완전하게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르네상스 당시 성직자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지어진 풍자글이다. 그런데, 이 중에는 역설적으로 저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메세지를 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범죄와 스캔들로 유명한 Borgia 가문이 배출한 두 교황 중 아마도 교황 알렉산더 6세 시절이 이야기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Borgia 가문은 근본적으로 마피아 패밀리였다. 교황 역시 내연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여러 사람을 독살했던 이로 유명하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여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방탕하였다. 그 가문과 교황의 더러운 치부, 끔찍한 스캔들은 외부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야기는 파리에서 시작된다. 파리에는 신앙심이 깊은 주교가 있었고 그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상인이었다. 둘은 신학을 논하기도 했는데 주교는 문득 이런 좋은 친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세례를 권해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브라함이 주교에게 와서 “여보게, 사업 때문에 내일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어서 작별 인사하려고 들렀네. 석달 동안은 보지 못할 걸세. 일이 잘되도록 빌어주게.” 주교는 깜짝 놀랐다. “로마라고?” “그래, 교황의 가문에 숙식하면서 바티칸 은행과 비즈니스를 할걸세.” “이보게 아브라함, 내가 알기로 자네는 세례를 받기 일보직전일세. 세례를 먼저 받고 출발하는 게 어떤가?” “왜 그러나?” “글쎄… 그 쪽은 뭐랄까 좀 혼미한 곳이네. 진리를 보기가 힘들 것일세. 이곳 파리에서 훨씬 더 진실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네.” 아브라함은 말했다. “아닐세. 사업을 먼저, 기쁨은 나중에, 이것이 내 모토라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기쁨이라면 나는 비즈니스를 먼저 해야 하네. 로마로 가겠네. 석달 뒤에 보세.”

다음날 친구는 배를 탔고 주교는 ‘이제 친구를 잃었구나’하고 한탄했다. 거기서 온갖 부패를 목격하게 될 것이니 이제 가톨릭의 신자가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는 이듬해 봄에 돌아와서 그에게 말했다. “자, 이제 나는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네.” “아니, 로마에는 가지 않았던가?” “갔었지.” “교황의 집안에서 기거하지 않았나?” “기거했지. 다 만났다네.” “그러면, 바티칸 은행하고 거래를 하지 않았나?” “물론 거래했지.” 아니 그런데도 지금 가톨릭 신자가 되려고 한다는 말인가? 이해를 못하겠군.”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보시게. 나는 신학자가 아닐세. 자네 신학을 이해하기 힘들다네. 다만, 나는 사업가로서 분명한 팩트 하나를 알고 있다네. 세상의 그 어떤 비즈니스도, 그렇게 멍청하고 부패했다면 2주(14일)를 버티기 힘들다는 것일세. 자네의 종교는 천사백 년을 버텼지 않은가. 이는 진정코 기적이네. 나는 충분히 납득됐다네.”

복카치오는 풍자하려는 의도로 이 글을 썼지만 정반대로 나를 설득력 있게 위로해 주는 글이기도 하다. 어떻게 순전히 사람이 세운 기관이,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도움도 없이 멍청한 우리 인간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가끔 지도자들은 자신의 손을 보석반지와 명품로션으로 치장하는 데에만 열중할 뿐 달을 가리키는 데에는 관심조차 없는데도, 어떻게 전통적인 믿음의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이렇게 이천 년이나 이어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배의 선장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작년 여름에 들려온 소식은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와 오고가는 사람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축의 기울기는 한결같고 그래서 나는 안심한다. 또, 폭풍이 이는 호수 위에서 배가 침몰할 지경이라며 모두가 아우성치고 있지만 뱃머리에서 평화롭게 아직 잠을 자고 있었던 그를 떠올리면 좀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라보아야 할 곳을 바라본다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지만, 어두운 밤의 폭풍과 파도만을 본다면 바로 물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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