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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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자주 깬다. 잠이 다시 올 때까지 지척이며 기다려 보지만 두어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만다. 수면음악이라는 것을 귀에 꽂아보아도 오히려 머리가 더 말똥 해질 뿐이다. 아니, 실제로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어떤 계획을 세우든, 무슨 해결책을 발견하든, 아침에 일어나서 반추해보면 그처럼 어리석은 망상도 없다. 아무리 진실한 사랑고백을 담아도 밤에 쓴 편지는 절대로 부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부쳤다가는 경멸을 받거나, 아니면 동정을 받게 된다. 좌뇌든 우뇌든, 사람의 뇌기능은 오직 직립보행의 자세일 때에만 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그 어떤 고민도 밤잠을 설쳐가며 누운 자세로 하는 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시간 낭비이다. 차라리 아침에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현명하지 싶다.

아직 일어나기는 너무 이르다. 유투브에서 영어 강의를 찾아 들었다. 5분 내로 잠이 든다. 그러나 그 강의가 끝나니 희한하게 다시 잠이 깬다. 기껏해야 1시간을 눈 붙였다. 다른 강의를 찾아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아침이 되니 밤새 무슨 취조를 당한 것만 같다. 강의 내용은 당연히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동안 이런 수면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낮에는 머리가 살짝 아프기까지 하다. 낮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지 못하는 날이면 몸이 쉽게 지쳐버리고 만다. 이제는 대책을 좀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식사량을 조절하고, 매일 30분이라도 운동을 하며, 커피는 이제 오전에만 마셔야 할까 보다.

딱히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정체 모를 불안감은 왜일까? 어쩌면 존재자체가 가진 근원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나이나 나쁜 생활습관 때문만이 아니라면 평생 안고 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 세상을 모두 나에게 준다 해도 이것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는 하나의 욕구 주머니 같은 것이 있나 보다. 그 갈증이 채워지기까지는 누구도 평화를 얻지 못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니 참 불편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그 모든 현인들의 한결 같은, 한치의 이견도 없는 공통된 증언이다. 이 정도면 집단지성이 발견한 과학적 명제에 가까울 정도다. 그 어떤 물질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떤 욕구가 인간 내면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인간이 물질보다는 더 큰(?) 존재라는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종종 어떤 맹세나 고백을 할 때,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수사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탐스러운가”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한다. 요즘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 인생목표인 사람들이 많은데, 누군가가 나에게 강남의 수십 층짜리 빌딩 하나를 통째로 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나아가, 강남에 있는 빌딩 모두를 준다면? 거기다가 뉴욕 맨하튼에 있는 모든 빌딩을 보너스로 얹어 준다면? 보태서, 캐나다 TD 은행의 모든 지점에 있는 돈을 선물로 준다면? 거기다, RBC, BMO를 포함하여 모든 은행의 돈이 내 것이라면? 더하여, 서울 여의도와 뉴욕 월스트리트의 모든 금융기관의 돈이 나의 것이라면? 거기다가 세계 최강군대의 통수권자가 되고, 전 세계 모든 미녀들이 나의 계집종이라면? “이 세상을 다 나에게 준다”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외에도 지구의 그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악마에게라도 무릎을 꿇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현인이 말했다. “세상 모두를 차지한들 오늘 밤 네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물질은 인간의 영혼을 쉬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작은 빌딩 하나를 소유하려고, 소유했다면 그것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하다가 죽어간다. 소크라테스는 ‘바보’를 정의하기를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이번만은 다르겠지 하고 자꾸 시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을 소유하는 날이 오면 내 영혼 평화를 얻으리라.” 지구는 나를 포함하여 바보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우주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이런 종류의, 채워지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욕구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C. S. Lewis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적 욕구와, 자라면서 습득하게 된 인위적 욕구가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욕구는 나의 밖에 그 욕구의 대상이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 허기를 느낄 때 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갈증을 느낄 때 물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성적인 욕구가 있을 때 섹스라는 것이 존재하고, 고독을 느낄 때 친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정말 타고난 것이고, 그 대상이 우주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물질적 우주를 벗어난 곳에라도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타고난 자잘한 욕구들에는 모두 그 대상이 존재하는데, 가장 큰 욕구인 “영원히 기쁨과 행복과 사랑과 평화와 앎을 누리고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에는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거대한 사기극이 될 것인가! 인간의 실존 자체가 악의적인 조롱이 될 것이다. 화성에 도착해서 어떤 로봇을 발견했는데 연구해보니 그 안에 소화기관은 있고 그 어디에도 그 소화기관에 적용될 음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 로봇은 음식을 찾아 헤맨다면 그 얼마나 황당한 상황일까?

악마는 옛날 중동의 어떤 사막에서 굶주린 예수께 딜을 제안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게해줄께.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나 같으면 그 탐스러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전부라면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느 성인의 말처럼 인생은 하룻밤 숙소에 불과하다는 패러다임을 가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떤 이는 냄새 나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운이 좋아서 오성급 호텔에서 단잠을 잘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밤새 열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건강한 숙면을 취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하룻밤이다. 숙소에 굳이 새 가구를 사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불면도 괜찮다. 그래 봐야 하룻밤이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로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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