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인지, 벤쿠버인지? 난 아기 늦게 낳아서 이제 9살 아들이 있다. 네 프로필 사진 보니 좋아보인다.” 학교 다닐 때 친했던 형에게서 카카오를 통해 연락이 왔다. 다른 친구를 통해 연결이 되었다. 한참이나 연락이 끊겼었다. 거의 20년만이던가… 뜻밖에 오랜 벗과 연락이 닿으니 아침부터 기분 좋다. 옛날 사진도 같이 보내왔다. 겨울 설악산 대청봉을 얼마 두지 않은 언저리에서 멀리 눈덮인 산들을 배경으로 단둘이 찍었던 사진을 스캔한 것이었다. 보내줄 사진을 고르느라 사진첩을 뒤적이며 추억에 잠겼을 그의 모습이 선하다. 25년 전 우리 청춘의 단면들을 엿보는 동안 추억의 실이 한올 한올 풀려갔으리라. 가을이라는 계절 탓인지 어쩌면 오십이라는 나이 탓인지 옛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까맣게 잊고지냈던 어릴 적 친구를 낯선 도시의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듯, 난데 없는 기쁨이 자꾸만 번져간다.
“우리한테도 저런 때가 있었군요. 형은 늘그막(?)에 좋은 일(아들)을 봤네요. 잘 지낸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우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 토론토에서 두어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살아요. 한국에 나가면 꼭 연락할께요.” 진심이었다. 꼭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랬다. 카톡으로는 언제 다시 메세지를 주고받을지 기약이 없었지만, 일단 만나기만 한다면 새벽이 올 때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것만 같았다. 마음 걷잡지 못하고 헤매던 청춘을 함께 했던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전처럼 이번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가수의, 알지 못하는 노래를 보내왔다. 전에는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내게 선물해준 적도 있다. 이제는 ‘링크’를 해왔다. Dan Fogelberg라는 1980년대 가수의 “To the Morning”이라는 노래였다. 형은 음악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졌고, 그를 통해 아름다운 가사의 팝송을 많이 알게 되었었다. 경영학도로서 어울리지 않게, 자유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형이었다.
“해가 뜬다. 지붕 위로 올라온다.
따뜻한 아침. 구름이 있다. 태풍이 올까. 알 수 없다. 아침에는.
하루가 시작된다. 어떤 하루일지 모른다. 아침에는.
그래 이제 하루다. 말이 없다. 그저 아침이다.
편지를 기다린다. 어쩌면 오랜 친구. 어쩌면 추억 속 연인.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즐겁다. 누가 또 써 보낼까?
계절은 변한다. 사람들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랑이 익숙해질 날이 오겠지.
하루가 부스럭거리며 서둘러 사라진다. 내일이 올 때까지 숨는다.
동이틀 때면, 손으로 눈을 비빌 때면, 그 때 깨닫겠지.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그것 말고는 모른다. 아침에는.”
대략 번역하면 이런 가사였다. 형이 좋아할 만한 노래였다. 간만에 카카오로 주고 받은 짧은 소식에 이런 노래가 생각났나보다. 그는 지금도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세월이란 그저 책장을 넘길 때의 앞페이지와 한참 뒤에 오는 뒷페이지와의 사이일 뿐, 똑같은 책 안이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책의 내용이 남을 뿐, 페이지 사이의 간극은 의미가 없어진다. 변화의 측정단위라는 시간이라는 것이 멈추고 천 년이 어느새 하루와 같아진다. 그가 보낸 사진과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에게 20년과 그 사이의 변화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추수감사절이다. 아내와 함께 401을 달려 토론토에 있는 처가를 다녀왔다. 장인장모님은 늘 그렇듯이 최선의 음식을 마련하셨고 우리는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몇끼를 같이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느 새 두 분은 백종원씨의 도움으로 남부럽지 않은 요리사들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두 분과 인연을 맺은지도 벌써 20년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두 분 모습과 생각은 가끔 낯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하신 음식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월의 변화가 갈라놓은 우리 사이의 간극이 점차 희미해졌다. 가끔 같은 페이지에 있기도 하고 주로 다른 페이지에 있지만, 그래도 두 사람과 같은 책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으며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가끔, 엄마 뱃속에 있던 태아시절에 찍은 초음파 사진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물고기를 닮은, 사지와 눈 코 입조차 구별하기 힘든, 손톱만한 크기의 태아가 지금의 나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뭔가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그 낯설고 코딱지만한 형상 안에 나의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생후 1개월 된 태아와 50이 된 나와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50년의 세월을 건너, 분명 모양과 성분(?)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음에도, 과연 우리는 그래도 같은 인물일까? 지나온 세월의 변화와 상관없이 똑같은 ‘나’라면, 우리(?)는 아마도 같은 책 속의 다른 페이지에 각각 있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는 책장을 넘겨도 변치않는 어떤 메세지가 있을 것이다. 양상은 달라져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하루가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시작되어버린 인생 길 위에 아직도 나는 서 있다. 태아 시기의 새벽을 지나고 청춘의 아침을 지나 어느새 하루의 오후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계절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어느 순간 그 무수한 변화들은 가을 낙엽처럼 사라지고, 우리는 모두 같은 책 안에서 긴밀한 스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