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린다. 아침에 가족들에게 짜증낸 것에 대한 당황과 후회가 담겼으리라. 한국에만 고3 스트레스가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진로는 정했지만 고민이 많다. 울면서도 최소한의 자긍심을 지키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나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자녀의 일에도 이렇게 담담하다니 스스로 실망스럽고 심지어 죄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렇게 마음이 딱딱해진 것일까? 내 마음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고립된 우주, 온통 어둠으로 가득찬 우주와도 같다. 그 안에서 작은 촛불 하나 켜고 있을 뿐이다. 내 촛불의 밝기로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딸의 촛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큰 깨침을 얻더라도 빛의 반경이 거대한 어둠을 만족스럽게 밀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작은 촛불 하나 더하려 아둥바둥이다.
나는 고립된 원자일까? 아무리 독수리 같은 존재라고 자기최면을 건다 한들 스스로에게 위엄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타인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의 기쁨으로 인해 내가 불행을 느끼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도 알 길이 없다. 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다행이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우리 모두 추운 겨울의 들판에 사는 고슴도치들이라고 했다. 추워서 서로 가까이 가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서로 가시에 찔려 다시 멀어지고 만다.
애초 사람은 ‘한 몸’이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돌들은 서로 제각각이다. 천사들도 애초부터 제각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인해 인간들은 한 몸에서 다른 몸이 나와도 모두가 같은 몸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각자가 서로 고립된 개인들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어떤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우리 의식이 그만큼 총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핏줄끼리는 그 의식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다. 아버지가 못된 죄를 지으면 아들도 왠지 수치를 느끼고, 아버지가 존경을 받는 분이면 아들은 왠지 뿌듯하다. 아들이 실패하면 아버지는 안타깝고, 성공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듯 자랑스럽다. 삼촌 사촌 오촌으로 갈수록 이런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말지만, 사실 부계와 모계의 성씨를 모두 걷어내면 우리 모두는 ‘실제로’ 피가 섞여있는 현실적 친척, 모두가 모두의 친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민족과 성씨라는 관념(!)이 사람들의 눈을 가렸을 뿐이다.
과거에는 조상들이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다만, 큰(grand) 아버지, 더 큰(great grand) 아버지, 더 더 큰(great great grand) 아버지라고 불렸을 뿐이다. 조상은 다 아버지로 불리고 후손은 몇대손이건 간에 모두 ‘아들’로 불렸다. 나아가, 한 민족도 하나의 몸에서 나왔으므로 당연히 스스로를 한 덩어리로 생각했다. 그 댜양한 민족들 역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을 것이므로 모든 인류는 결국 한 몸인 셈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를 황당해 하겠지만……
우리는 전쟁과 투쟁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이러한 인식의 지평을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잃은 지가 오래다. 민족들이 서로 남인 것은 물론이고 현대에 와서는 개인들마저 원자처럼 고립되었다. 어쩌면 나는 자신의 자녀와도 마음이 일치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병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 옛날 애초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앞선 조상과 현재의 이웃들이 사실은 나와 한 핏줄,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내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설사 용서를 청할 수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서 나와 다른 시대에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내가 왜 용서를 청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혹은 몇 천년 전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고 해도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모를 것이다. 인류의 존재 방식은 시간과 공간에 펼쳐져 있을 뿐,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이다. 다만 우리 의식이 눈에 껍질이 씌워진 듯 아둔하고 투미해져서 단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뿐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꽃’이라 불리는 요세피나 바키타라는 성녀가 있다. 그녀는 9살 때 노예상인에게 납치당해 수단의 노예시장에서 5번이나 팔려다니며 암흑의 시간을 보내다가 수녀원에 맡겨지며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라는 책의 서두에서 희망의 증인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노예주인의 학대를 받을 당시 동료가 ‘당신을 어떻게 이런 현실을 견디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 사람은 단지 아픈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어떤 바이러스 같은 것에 걸려서 사실은 한 몸이면서도 고립감에 시달리며 ‘남’과 투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퍼진 악은 우리 몸이 치르고 있는 병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병도 악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무엇인가에 기생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영혼이 악으로 오염되고 죄로 뒤틀린 상태여서 건강한 몸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든 정의는 바로 세워져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는 오십보 백보 같은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자비가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 고립된 자신의 처지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어쩌면 희망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실 우리 모두 한 몸이었고, 우리 중 어느 영웅적인 대표의 몸에 가해진 처벌과 저주로 인해 정의가 이미 실현되었으며, 그 희생 덕에 같은 몸인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비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어찌저찌 믿게된다면, 그 희망은 탄력을 받아 우리가 고립된 우주를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나도 아프리카 바키타 성녀처럼 눈에서 껍질이 떨어져 나와 악인과 악을 구별하는 눈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선량함이 같은 몸인 나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지금은 참담하더라도 ‘희망으로 구원’되고 싶다.
얘야, 그날 너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