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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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너무 일찍 왔다고 느꼈었는데 이번 연말연시는 의외로 따듯한 날씨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반갑지만 왠지 기후가 정상을 벗어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1월이 시작되니 곧 다시 추워진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역시 만물이 정상적 조화와 궤도로 돌아오는 것이 속 편하다. 북극 바람을 등에 업은 추위로 날씨가 제법 혹독해지더라도 내게는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 연말시즌에 들은 캐롤 중에서 “Let It Snow”가 있다. “바깥 날씨는 끔찍하다. 그치만 실내 벽난로는 따시다. 뭐, 딱히 어디 갈 데도 없고… 눈아, 내릴라면 함 내려봐라.” 가사처럼, 거실 창 너머 눈폭풍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날이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이런 따듯한 보호를 언제까지 누려도 되는지,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깥에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나의 성숙을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고 언젠가는 그것을 찾으러 길을 나서야하지 않나 하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요즘에는 혼자 살면서 몇달 이상이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내는 사람이 늘고있다고 한다. 일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하고, 먹을 거리는 배달을 받거나 ‘혼밥’으로 해결하고, 사람들과는 전화나 텍스트로 소통한다. 우리 세대는 이런 생활을 고립과 소외라고 불렀지만 막상 본인들은 시대적 현상으로서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얼굴을 대하지 않고 소통하는 까닭에 이모티콘이 발달한다. 문자를 주고 받을 때는 퉁명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적당한 이모티콘이나 ^^ 같은 표시들을 붙인다. 그것들이 사람의 표정을 만드는 미세한 얼굴 근육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점점 여행보다는 고립이 익숙해지기도 한다. 전에는 스페인의 ‘산티아노’ 순례길이 버켓리스트였지만 차승원 유해진이 출현했던 ‘스페인 하숙’을 보고 나서는 오히려 흥미가 떨어졌다. 장모님은 커다란 화면에서 스크린 세이버를 통해 자동으로 바뀌는, 세계 곳곳의 멋진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이미 거기에 갔다가 온 것처럼 느껴져서 굳이 실제로 그곳들을 여행해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기술의 발달이 여행의 의미를 점점 퇴색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구들마저 테이블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식사하기보다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에 따로 식사를 한다. 나의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고립과 소외의 고통을 덜어준다 하더라도 사실은 (궤도를 벗어난 기후처럼) 이런 생활방식은 왠지 좋지 않은 징조 같아서 찜찜한 느낌이 든다. 공황장애같은 것이 찾아오기 전에, 설사 바깥 날씨가 혹독하더라도 따듯한 실내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야만 할 것 같다. 추운 겨울에 혼자 대천해수욕장 모래사장을 거닐던 그 쓸쓸함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지만, 그렇더라도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만 과학기술의 달콤함을 이기고 삶을 정상적 궤도로 다시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드물게 즐거운 경험을 했다. 거의 넉달 동안 일주일 중에 한시간씩 어떤 사람과 만나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신념체계를 나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상대방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 평생동안 내성적이라 스스로 생각해왔고 어릴 때는 심지어 전화받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터라 남 앞에서 말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어릴 때 못했던 말들이 지금 터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허영이나 교만이 주는 은밀한 달콤함에 빠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상대방과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오는 깊은 위로는 실내에서 혼자 불을 쬐는 안일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해도 얼굴을 마주보고 소통하는 것에는 화면이나 문자에서 얻을 수 없는 깊은 만족감 같은 것이 있다.

문명의 발달이 점점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AI가 발달하고 양자컴퓨터 또한 개발되고 있다는 소문이니, 화면은 더욱 사실적으로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점점 밖에 나갈 이유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더라도 ‘거룩함’만은 통신기술로는 전달되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야 전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유통 경로는 그 원천에서 사람에게로,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다만 지금은 불순물과 좀 섞여서 희미하게 전달될 뿐일 것이다.

거룩함이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속된 세상에서의 ‘분리됨’이다. 그러나, 늘 천상적인 것을 비틀어 조롱하는 것이 악의 오랜 버릇이듯, 악 역시도 ‘분리함’을 좋아한다.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기를 좋아해서 (이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영혼이 육신과 독립적으로 이 몸 저 몸 옮겨다닐 수 있는 것처럼 속이고, 영혼과 별개로 누드인 몸을 맘껏 즐겨도 되는 것으로 세뇌시키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짓말과 비난(accusation)을 통해서 이간질 시킨다. 한국에서는 일부 비뚤어진 검사들이 기소를 남발하고 재판 받기도 전에 언론플레이로 범죄를 기정사실화하여 피의자를 망신주기도 한다고 들었다. 마음 안에서 나는 그런 검사이고 동시에 그 검사 편만 드는 재판관 노릇도 한다.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밖에 나가서 어딘가에 있을 거룩한 변호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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