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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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는 실제 삶과 동떨어진 그야말로 같잖은 스토리 투성이지만 그래도 드라마에 빠지다 보면 그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휴식을 가지게 된다.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준 낮은 휴식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멍 때리기’ 처럼, 뇌를 일상의 근심 걱정이나 고단함으로부터 손쉽게 놓여나게 할 수 있어서 시간의 흐름만이 줄 수 있는 힐링을 비록 잠시만이라도 맛볼 수 있게 한다.

어쩌다가 ‘치즈인더트랩’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쥐덫 안의 치즈’라는 뜻인가? 남자 주인공이 남에게 사용하는 징벌의 방법인 듯.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웹툰(인터넷 만화)을 기반으로 만든 드라마. 10학년 아들래미와 8학년 딸래미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대학생활을 소재로 한 멜로 드라마이지만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을 입힌 것이 톡특했다. ‘뭐 저리 싸이코들이 많아’ 하고 아내는 말했지만 아내도 나도 1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새 여주인공의 매력에 폭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스터리의 핵심역할을 하는 남자 주인공(A)에게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극 전체에 색깔을 입히고 스토리를 끌고 가는 에너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재미 없어서 안보게 될텐데 그래도 계속 보게 된 것은 회를 거듭할수록 여자 주인공과 함께 또 다른 남자 보조 주인공(B)에게 점점 끌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재미있다는 소문만 듣고 봐서 그런지 아니면 인물들이 신인들이라서 그랬는지 처음 2회 3회까지는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보조 역할인지도 몰랐다. 주인공이 B이기를 ‘원했고’ 언제 여주인공이 B와 맺어지는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회로 치달아서도 내 끈질긴 기대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요즘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그런 음습한 캐릭터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우다니 분한 생각마저 든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성격이 ‘쿨’ 하게 보이는 걸까? A는 여자친구를 비롯하여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남모르게 권모술수를 동원한다. 그 음모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될 정도로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가책이 별로 없다. 아, 우리 착한 여주인공은 그래도 그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순애보를 보인다. 하긴 그 놈에게도 B하고는 뭔가 일말의 사연이 있기는 했다. 아무 이유없이 B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에 A는 유일한 친구로 알았던 B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자기를 험담하는 것을 엿들었다. 그 배신감이야 이해할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로서 전도 유망했던 B의 손을 남을 이용해 망가뜨릴 만큼 잔인한 A의 본성이 정당화 될까? 아무리 봐도 정신적으로 심한 장애가 있는 인물이다. 마지막회에 남자는 여자와 헤어져 ‘자신을 돌아보는’ 힐링기간으로서 3년 정도 유학의 시간을 가진다. 그의 일생에 걸친 비겁하고 차가운 내면은 그래서 3년만에 치유가 다 되었는지 결국 둘은 다시 사귀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실제 웹툰 작가는 드라마와는 달리 아직 스토리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작가가 요즘 한국 젊은 층을 대변한다고 가정한다면 아무래도 나는 그들과 세대차이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드라마들의 공식에 따르면 분명 B가 남자주인공이 되어야 맞다. B는 불행한 처지였지만 그처럼 구김살이 없고 밝을 수가 없다. 말은 양아치처럼 거칠지만 주위에 아이들이 항상 꼬이고 어른들은 무엇 때문인지 B를 자식처럼 대해 주며 어떤 친구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그를 도와준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했던 꿈을 찾아간다. 이런 캔디 같은 녀석이 우리 착한 여주인공과 맺어져야 맞다. 그런데 요즘 세대는 드라마가 재미있기만 하면 주인공이 싸이코라도 상관없나 보다.

어쩌면 B가 애초에 A보다 월등하게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소지섭 같은 배우가 그 역할을 했더라면, 그리고 삼각관계에서 늘상 보조로 나오는 배우가 B역할을 했더라면 어쩌면 A의 비겁함과 차가움과 잔인함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누가 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똑 같은 행위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섬뜩한 생각도 든다. 잘생기고 아름답고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내 눈을 흐리게 하고 급기야는 무의식 중에 가치관을 무디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재미는 재미일 뿐 이깐 드라마 하나 그냥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요즘 부쩍 한국드라마를 많이 보는 캐나다산 2학년짜리 막내를 보면 쉽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식구들이 돈을 모아 아내의 생일선물로 시계를 샀는데 그것을 보고 막내가 무심코 물었다. “엄마, 이거 명품이야?”

아무래도 드라마를 보고 휴식을 취하는 것은 이젠 좀 자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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