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게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의 여섯번째 속편을 보게되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보면서 우리를 충격과 공포와 전율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T-800이라는 모델의 살인로봇은 이번에는 기필코 미래 영웅 ‘존 코너’를 살해한 후에 잠적했다가 거의 40년 만에 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생체 피부는 인간을 닮아 노화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 로봇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에 대해 그 의미를 반추할 수 있게 되었고 가책을 느끼며 회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결국에는 인류에게 닥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여 지난번 2편의 모델처럼 영웅적인 희생을 택한다. 그 때 여주인공 ‘사라 코너’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웠던 로봇’이라 말하며 울먹였던 것 같다.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만 한다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터무니 없어도 관대해지고 심지어는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스토리 자체가 주는 개연성보다는 감각적인 비주얼이 주는 쾌감에 사람들은 먼저 몰입하게 된다. 세익스피어가 지금같은 감각적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예전처럼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영상화가 되더라도 오감에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속편의 스토리에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다섯 명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여 대자본의 제작사가 만드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들이니 아마 지금 기준으로 따지자면 셰익스피어 만큼이나 날고 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출중한 사람들이 만든 스토리가 결국 저 영화의 초라한 얼개가 된 것이다.
영화는 요즘 폭발적으로 진보하고 있는 인공지능(AI)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감에 기반하여, 정교하고 현란한 그래픽 기술로 이야기를 포장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스토리가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고 있다. 볼 때는 뭔가에 홀린듯 몰입하지만 그 두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무한 폭력의 잔상들만이 남는다. 그러나 시간을 더 값지게 보낼 마땅한 대안도 없어서, 다시 시각적인 자극거리에 목말라하며 더 크게 부수는 블록버스터나 더 창의적으로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R등급의 영화들을 찾게 된다. 그러나 파괴와 훼손의 쾌감은 공짜가 아니다. 프로이트 덕분에 무의식이 얼마나 일상의 실제 행위들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 지금, 그러한 시각적 이미지가 내 무의식의 어두운 창고에 온통 앨범으로 차곡차곡 보관되어 넘치게 되면 어떻게든 현실에서도 그 이미지들을 모방하는 행위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나 자신도 걱정이지만 이런 시각적 환경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도 걱정스럽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비주얼을 걷어내고 조금 차분해지자.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어떤 것은 현실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모순이 있는 것들이다. 예를들면, ‘둥근 사각형’, 혹은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 등이다. ‘참회하는 로보트’도 마찬가지이다. 참회라는 것은 죄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죄는 자유의지를 이미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아무리 인공지능(AI)이 스스로 고도의 학습을 거듭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도덕적 선택을 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규칙을 줄 수는 있지만 ‘자유로이 그것을 어길 수 있는 잠재력을 이미 가진 존재’를 사람이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규칙을 일부러 어기는 결단을 하는 자유의지도 로보트에게 심지 못할 뿐더러, 그런 행위 때문에 괴롭게 되는 ‘양심’도 심지 못한다.
AI가 자신을 대상화하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고찰하여 때로는 참회하기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후에 자신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도덕적인 희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잘못된 근대교육 탓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우리 인간의 현존재가 몇십억년 전 어느날 화학물 웅덩이에 번개가 쳐서 우연히 유기물이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배웠다면, 언젠가 로보트도 인간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에 따르면, 몇십억년에 그렇게 번개로 우연히 만들어진 유기화합물이 모여 어쩌다가 단세포가 되고, 그 세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엄청난 능력을 우연히 장착하게 되고, 그러다가 여러 복잡한 기능들이 분화하여 유기적으로 결합한 하나의 개체로, 또 그 개체는 여러 세대에 걸쳐 멸종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번식하고, 결국 식물이나 물고기로, 물고기는 어쩌다가 동물로, 동물은 기적적인 도약을 통해 인간으로 진화한다. 결국 지금 인간의 현존재는 물질과 우연과 기적의 산물이다. 마침내 물질은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물질’이 된 것이다. 너무 무리한 가설들과 도약으로 가득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세가지라고 한다. 첫째는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고, 둘째는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고, 세째는 보이는 것보다 작다는 것이다. 첫째의 관점은 물질적 존재 외에도 영적인 존재들의 실재를 아직 믿는다. 둘째의 관점은 모든 것이 물질이라는 유물론자들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째의 관점은 보이는 세상에는 허상이 많다는 불교적인 사고이다. AI가 결국 인간의 본질과 같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둘째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는 크리라 믿는다. 무형의 존재들이 보이는 유형의 존재들 사이의 커다란 갭을 메꾸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시대가 지나 내 두뇌에 있는 모든 기억과 패턴을 담을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날이 온다 해도 그 로봇보다 내가 더 클 것이다. 그 로봇은 또 다른 나가 아니라 그저 나의 기념관 같은 것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연에서 존귀한 이유는 ‘죄를 지을 잠재력마저 이미 가진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 아무리 악인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그 존재는 누군가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증거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세계를 초월하여 자아를 인식하고, 자유로운 행위와 그에 대한 가책과 참회와 앞으로 희생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노트에 소설의 주인공처럼 씌어진 존재, 혹은 도화지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에서는 악인이거나 혹은 도화지의 한 부분에서는 어둠밖에 없을 때도 있지만, 도화지 위의 어둠은 옆 자리의 빛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이듯, 혹은 혼돈의 붓자국이 멀리서 보면 모나리자 같은 명작이듯, 어쩌면 사람에게 생기는 아무리 끔찍한 굴곡들도 결국은 어떤 황홀한 직선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제발 T-800이라는 로보트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