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4) –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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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릇푸릇했던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농담삼아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늘 넉넉치 않았다. 학기 중에도 과외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피곤에 절어 있었고, 황금같은 젊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버겁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럴 때에도 호기로운 한 친구의 선동으로, 간혹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로 중대한 결심을 할 때가 있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고는 했지만, 실은 매일매일을 시든 사과처럼 살지만 말고 오늘 하루만큼은 뭔가 더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반어법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다. 친구의 선동에 넘어간 우리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다른 날로 미루고 공부를 미루고 과제 제출 준비를 하루 미루는 대신,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어딘가를 다녀오거나, 학교앞 호프집에 모여 별것 아닌것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고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그렇게 우정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또 그 다음날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곤 했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생겼었다. 꽤 오래 전 어느 여름날, 앤드류씨를 만났다. 앤드류씨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왔었다. 스텐트 (#1) 시술을 받았고 심장 기능이 다소 저하되었으나 회복 중에 있어서, 앤드류씨의 와이프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병원에 실려온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침대에서 나오던 앤드류씨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왼쪽 다리를 쓸 수가 없었다. 놀란 와이프가 급히 복도로 나와 간호사를 호출했다. 간호사들 몇명이 서둘러 앤드류씨를 침대로 눕혔다. “앤드류씨, 미소를 지어 보세요”. 앤드류씨의 왼쪽 입술은 움직이지 않아 웃는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들어보세요”. 왼쪽 팔은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뇌졸중 증세가 확실했다.

코드 스트로크 (Stroke)가 방송으로 알려졌고, CT 촬영 결과 좁아진 뇌혈관 한 곳이 혈전으로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이 있었다. 심근경색에서 살아 남은 앤드류씨에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우리 간호사들은 몹시 상심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당일 늦은 오후쯤, 앤드류씨가 몰라보게 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왼쪽 팔다리가 아직 오른쪽만큼 힘을 쓰지는 못했지만, 앤드류씨는 두 발로 설 수 있었고 보행이 가능했으며, 왼쪽 팔과 손의 힘도 좋아지고 있었다. 앤드류씨와 그의 와이프만큼 우리 간호사들도 몹시 기뻤다. 뇌졸중으로 인한 영구적 뇌손상이 아닌 일과성 허혈 발작 (TIA-Transient Ischemic Attack, #2)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에는 앤드류씨에게서 뇌졸중의 증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또 다른 항응고제가 처방되었고, 보행이 거의 자유로와졌던 앤드류씨는 이튿날 저녁 일곱시 경, 심장질환집중치료실에서 심장과 일반병동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앤드류씨의 와이프는 오랜만의 단잠을 청하러 집으로 떠났다. 앤드류씨는 나에게 그가 살아왔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동안 나는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어요. 올초에 은퇴를 하고 이제서야 와이프와 여행도 하고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하려고 계획했었죠. 사실 다음 주 난생 처음으로 와이프와 유럽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취소를 하고 다음을 기약해야겠지요.” 앤드류씨는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했을 때, 어처구니 없게도 앤드류씨의 병실은 비어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밤사이 일어났다. 새벽녘, 화장실을 다녀오던 앤드류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코드 블루 (Code Blue-심장마비 발생)가 발동되었다고 했다. 수많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심폐 소생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여만에 코드 블루는 결국 성과없이 종료되고 말았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도착한 앤드류씨 와이프의 심정은 어땠을런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호기롭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기가 쉽지가 않다. 미룰 수 없는 오늘의 할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은 애써 잊으며 산다. 오늘 할 일을 미룰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오히려 하지 못하며 산다. 읽고 싶었던 책도 읽을 수 없고, 산책을 갈 수도 없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는 오늘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 한통을 할 여유도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도, 미안했었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도 하지 못했다. 정작 미루지 말았어야 할 일들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1. 스텐트 (stent): 좁아진 혈관속의 혈액 공급이 원활히 되도록 하고 혈관 내경을 넓히기 위해 삽입되는 금속으로 된 그물망

2. 일과성 허혈 발작 (TIA-Transient Ischemic Attack): 혈관이 좁아지거나 혈전으로 인해 뇌로 가는 혈액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시적 뇌졸중 현상.

(글쓴이: 김귀정.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다 2002년 캐나다 런던에 정착. 팬쇼 졸업 후 RPN으로 근무하며 웨스턴 대학으로 진학. 졸업 후 RN으로서 환자를 돌보며 신명나게 살고 있음. 글의 내용은 글쓴이의 경험을 토대로 각색되었으므로 사실과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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