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잔치는 끝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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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다. 싹이 났을 때 김을 매기도 하고 가뭄이면 물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생명의 원리가 전개되는 과정을 나는 부수적으로 거들 뿐이고 운이 좋으면 그 열매의 도움을 조금 받을 뿐이다. 땅마저도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니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소작농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가 이번 달이 지나면 벌써 열두 살이다. 고대에는 성인식을 치르는 나이이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12살 전후가 되면 두뇌 역시 유연함을 잃고 굳어지기 시작한다. 언어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그 나이 이전에 외국어를 배우면 그것이 몇개 국어가 되건 이후에도 모두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12살의 시기가 지나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그냥 줄곧 외국어로 남는다. 머리에서 모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혹은 훈련 정도에 따라 그 과정이 좀 빠를 따름이다.

우리 부부는 가끔 자괴감에 빠진다.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을 머리가 굳어진다는 12살 이전에 물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하는 길이 모두 막혀버렸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이라고는 스스로 진리로 여기며 살던 삶 그 자체였다. 무형문화재를 물려주는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풍요 속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반면 오히려 그 무형문화재를 물려주기란 낙타를 바늘구멍에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진다.

그동안 너무 방치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머리가 여물어진 막내에게 뭔가를 주입하듯이 전수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계속될 성장과정에서 가끔 김을 매어주거나 가뭄에 물을 주거나 할 수 있을 뿐 이제부터는 스스로 주위에서 양분을 찾아 섭취하고 내면화하여 자유롭게 자신을 가꾸어 갈, 아이가 가진 생명의 힘에 맡기는 도리 밖에 없다. 다만 땅이 저절로 생명을 키우게 한다는 것을 믿고 거기에 희망을 걸어본다. 칭찬과 격려와 위로의 물만 꾸준히 주어도 크게 일탈하지는 않으리라. 아이는 벌써 둥지에서 이미 밖으로 한발을 내디딘 것일까? 그 첫발이 돌밭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까이에 있는 존재와 그 생명의 약진을 내가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때가 많다. 배 속에 있는 태아도, 반항을 시작하기 전의 아이들도, 혼인으로 맺어진 내 아내도 처음부터 내가 어찌저찌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다가 열두 살이 지나면 아이가 변하고, 신혼을 넘어 열두 해 쯤 지나면 아내가 변한다. 어쩌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곡식처럼 그들 역시 늘 변하는데, 또 어떻게 그리되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헛되이 전전긍긍했는지도 모른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들도 시간과 공간 속에 펼쳐진 존재이고, 애초 그 존재의 씨앗도 그 변화의 과정과 열매도 이미 내 소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장난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관리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악이 창궐한다고 해도, 혹은 인생에서 남모르는 나만의 고통을 겪는다 해도 아마 세상이나 내가 고장나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존재의 씨앗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땅에는 이미 씨앗을 저절로 자라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좋겠다. 나 이외의 존재들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내가 잠깐 거들고 있을 뿐임을 기억한다면 그 열매가 잠깐 형편없어 보일지라도 그 존재자체를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는 그 자체로 신비롭다. 설사 과학이 씨앗의 성장 과정을 더 잘 도와서 좀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기여한다고 해도 결국 과학은 생명의 주인도 아니고,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how’을 조명하여 그것을 응용하는 데 능하지만, ‘why’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존재의 의미를 모르겠다, 굳이 꼭 알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확산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현대인은 바쁘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의미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놓고 같은 생각을 가진 진영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만 하면 그 진영의 논리를 점점 내면화하게 되고, 결국 주위 흩어진 정보들 중에 자신의 신념을 점점 확증해주는 쪽으로 모으게 된다. 소위 확증편향이다. 첫발을 잘 들여놓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다. 그리하여 모자이크를 주워 모아 끼우듯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첫 발은 모든 상황을 검증하고 두드린 다음 안심하고 디디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의미체계에 내디디는 첫 발은 (마치 결혼이 그러하듯) 신념이나 믿음이 개입되는 도박적인 행위와 비슷하다. 어짜피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디디는 첫발이고 그 끝도 과학적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죽는 상황이라면, 이왕이면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의미체계로 뛰어들면 좋겠다. 적어도 파스칼은 회의론자들에게 그렇게 조언한다.

열두 살이 된 막내야. 네가 어떻게 자라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 모르지만 너를 절망하게 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너를 행복으로 이끄는 의미체계로 첫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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