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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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영어를 왜 그리 못해?” 막내가 태클을 걸어온다. 아침 일찍 함께 치과로 가는 길이었다. 잠깐 팀호튼에 들러 내가 커피를 주문하는 소리를 듣더니 핀잔이다. “쌩큐가 뭐야, 쌩큐가…” 그래도 발음만 지적받아서 다행이었다. 영어로 하는 대화를 들었더라면 어떤 수모를 더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들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영어로 일을 한지가 꽤 오래 되었다. 영어는 그렇다치더라도 우리 말조차 버벅대기는 매한가지이다.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버퍼링이 한참 걸린다. 며칠 전에 아내에게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치매 초기 증상이 그런데……”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멀리 들녘에서 해질무렵의 만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지치고 피곤한 육신 위로 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

치과에서는 접수창구에서부터 헤맸다. 직원이 우리 신상정보가 바뀌었는지 이리저리 확인하는데 주눅부터 들었다. 스스로 동문서답하는 것 같아 초라한 기분이었지만 직원은 으례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조무사가 아이를 진료실로 데려가며 뭔가를 설명했지만 그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차마 ‘천천히 다시 말해봐’ 하지 못하고, 그냥 10년 이상 캐나다에서 살아온 통빡으로 ‘ok’하며 태연한 척 답했다. 막상 진료가 끝나고 결과를 들을 때는 희한하게도 똑같은 사람의 그 빠른 말이 차츰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언어 회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이의 이빨이 ‘crowded’라고 한다. 그래서 덧니와 함께 치아가 들쭉날쭉이다. 가끔 학교 음악 발표회 같은 데에서 합창을 할 때 입을 크게 벌이며 노래하는 친구들과 달리 아이는 유난히 입을 다문듯 무표정하게 노래하곤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중에 유치가 다 빠지고 영구치가 다 자라면 아래 위로 두개 씩 도로 뽑아내고 보철을 해야할 것이라고 한다. 치료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시술’ 같은 것이라서 보험으로도 어찌 해결할 수 없는 대공사이다. 언니에게도 들어갔던 만만치 않은 보철 비용이 문득 파닥거리며 오싹하게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아이의 웃음 근육이 퇴화하기 전에 빨리 조치해야할 것 같아서 마음을 다잡았다.

치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주곤 했었다. 이번에도 맥도날드에 들렀다. 아이의 눈치를 보며 다시 영어로 주문을 하는데, 문득 어젯밤 아내가 털어놓은 말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직장에서 6시간 동안이나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다행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웃프다고 해야할까? 듣다가 웃음 포인트를 놓쳐버렸다. 그래도 아내는 울고불며 다니던 10년 직장생활을 거치는 동안 이제는 이민 주신청자였던 내 영어를 한참이나 추월하고 있다. 문법이나 어휘는 아직 내가 낫지만, 언어라는 것의 주된 목적이 사람과 ‘소통’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내의 영어는 나를 훨씬 능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민 초기에 아내에게 ‘당신은 우리 집에서 병목이야’하고 놀린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이제는 아내가 ‘요즘은 당신이 병목이야’ 하며 내 자존감에 뒤끝있는 로우킥을 날리고 있다. 언어 자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어휘를 많이 알고 문법을 잘 안다고 해도 그 안에 담아내는 것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건 겸손해야 하나보다.

사실 언어로 지식을 수집한다 해도 아직 내용물이라 할 수 없고 수집한 것으로 지식의 탑을 쌓는다 해도 역시 결국은 좀 진화한 그릇에 불과하다. 비어있는 지식을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들, 반응은 싸늘할 수가 있다. 막상 호응이 별로 없으면 오히려 그 지식들은 마음에서 은밀하게 사람들을 평가하는 잣대, 무게를 달아보는 저울, 심지어 수술을 하는 날카로운 메스로 둔갑하곤 한다. 비어있는 언어, 메마른 지식은 그냥 빈그릇이기 십상이다. 그릇이 없으면 음식을 애초에 담을 수도 없으니 먼저 그릇을 빚기는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음식을 담을라치면 재료를 눈물 닦은 손으로 마련하여 주무르고 그 그릇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오랜 숙성의 세월을 가지도록 두어야 한다. 나누려면 좋은 그릇과 함께 숙성된 삶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담아서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밤도 빛이 된다’라는 구절을 읽고 울컥한 적이 있다. 습관이 되어버린 그 밤이 사실은 어떤 새벽빛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밤’이라는 언어가 가진 그릇에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가 담기기 시작한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듯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것이다. 수천 수만 번이나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사랑’이라는 단어조차도 그것이 얼마만한 깊이와 높이와 넓이의 그릇인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가장 단순한 것들도 알면 알수록 새로운 빛을 끝모르게 담아간다. 어쩌면 새로운 지식일랑 더 이상 찾아나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미 주어진 것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채로 세상에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 각자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졌을 것이다.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소경의 눈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모두 돌멩이로만 보인다. 사실, 모든 사물의 진정한 의미는 늘 눈꺼풀 너머 커튼처럼 가려져 있다. 그 커튼 너머에는 누구도 온전히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귀한 보석이 있으리라. 불행하게도, 안일한 일상에 땅과 하늘이 진동을 하는 사건이 생겨야 겨우 그 틈새로 눈부시게 빛나는 작은 조각들을 보게된다.

이미 지금 나는,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가 천사백만 번 이상의 시뮬레이션을 거쳐서 단 하나의 성공 가능성을 선택하여 실행하듯이, 내가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시나리오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눈을 뜨기만 한다면 나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어두움도 그 빛나는 시나리오의 일부라는 것을 가슴 시리도록 알게 될것이라 믿는다. 비록 영어는 좀 못하는 현재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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