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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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 가는 길에 잠시 장인 장모 댁에 들러 아들을 내려주었다. 아들은 거기서 이틀 묵으며 볼일을 보고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설에도 찾아뵙지 못하다가 오래간만에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심장에 사이다가 번지는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님, 어머님, 못난 사위 왔습니다.” 두 분을 차례로 안았다. 언제부터인지 (아마 처남이 어떤 명상 센터 같은 곳에서 배워온 것을 식구들에게 전파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이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 가벼운 허그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번처럼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몸짓도 드물 것이다.

왜 ‘못난 사위’라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다’라는 말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꼭 그런 겸손이 넘쳤던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농담 비슷하게 던졌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 실제로 내가 그랬었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못났음을 말로 고백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더 애틋해진다. 다른 볼 일이 남아있어서 점심만 급히 먹고 금방 다시 나서게 되었지만 두 사람과 머문 그 짧은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가득찬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늘 나에게 한결같다. 고백은 두 사람과 상관없이 그냥 나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가 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훈훈함에 젖었다. 이번 참에 생활 잔소리를 하는 아내에게도 한번 써먹어 보았다. “못난 남편이라 미안해. 내가 많이 부족하지?” 한두 번은 감동을 하는 것 같더니 세번 네번 계속하면서부터는 “그래, 아니까 다행이네”로 반응이 바뀌었다. 그 다음 번부터는 “마음에도 없는 말 그만해라. 빠져나가려고 기술만 늘었네”라는 핀잔으로 돌아왔다. ‘마음에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야 상대방이 받아주는 모양이다. 말한대로 마음과 행동이 거꾸로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으로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상대방은 겸손보다는 허위를 느끼기 십상이다. 상투적인 클리셰(cliche)는 신뢰를 무너뜨린다. 이제는 나 자신조차 그러한 반복적 화법에 진심이 잘 담기지 않는다. 그래도 처음 며칠동안은 행복했다.

스스로의 못남을 인정하는 것만큼 발가벗겨지는 느낌도 드물 것이다. 내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열등감에 시달려 왔다고 털어놓으면 주위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 눈치다. 남의 집안 일도 그렇고 남의 속도 그렇고 겉으로는 잘 모르는 법이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못났다’는 평가를 받을 때면 이미 다친 곳을 야구방망이로 다시 맞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내 잘난 점에 집착했었다.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 다소간에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도 하고 비례해서 열등감도 가라앉는 듯 하지만 결국 살다가 조그마한 흔들림이라도 생기면 열등감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우울이나 분노로 표현된다. 무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다른 이들보다 약한 것만큼 초조하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도 없었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서 시급한 것들이 하나 둘 해결되다 보면 결국에 마지막으로 바라게 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의 ‘존재감’인지도 모르겠다. 욕구의 종착역이다. 며칠 전에 한 모임에서 어떤 이가 자신은 마치 ‘광야’에서 생활하는 것 같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광야는 세상에 대한 기존의 집착들을 소멸시키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다짐하는 과도기적 장소임과 동시에, 굶주리고 외로운 상태에서 다시 스믈스믈 동경하게 되는 유혹들을 견뎌야하는 시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돈 명예 권력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그 집착을 반드시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 중이던 예수께 악마는 (내 생각에)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유혹했었다. 주림이 잦았던 고대 사회에서 빵(식량)은 곧 재산이었을 것이다. 천석군 만석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화폐가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곡식은 곧 ‘부’였던 것이다. 또,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져 살아남는 것은 신문기사 감이니 대중에게 수퍼스타 같은 유명세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리고, 높은 산에서 보이는 온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같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최고 권력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광야는 아이러니한 회색의 장소이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이런 ‘존재감에 대한 동경’을 내가 극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결국 이겨낸 사람들이 있으니 적어도 희망만은 가질 수 있겠다. 현대사회의 시류와 달리 내가 존재감이 없어도, 아니 오히려 존재감이 없어질수록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은 점점 강해진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사회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혹은 스스로의 욕망이 허구적으로 설정한 여러 등급에서 저 아래 혹은 저 위에 자리잡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등급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의 극단적 표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무리 속에서 굳이 존재감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그러한 등급이 모두 소멸될 때 마치 캄캄한 광야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 별이 눈부시게 내 심장으로 사이다처럼 쏟아지듯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든 존재들의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번듯한 전세집 하나 장만하지 못하는 처지임을 알고도 장인 장모는 나에게 귀한 딸과 결혼하도록 기쁘게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그 뒤로도 우리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당신들의 형편에 상관없이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곤 했다. 아주 오랬동안 나는 그것을 잊고 살아왔다. 오히려 이런저런 일로 마음 속으로 원망하기를 자주했다. 며칠 전 장인이 아내에게 몰래 연락해서 나에게 혹시 무슨 힘든 일이 있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못난 사위가 왔다, 못난 사위가 간다” 했던 인사말이 내심 안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그분들을 만날 때마다 ‘이 놈이 기술 들어오나?’할 때까지 그 인사말을 계속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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