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유인듯 여유 아닌 여유 같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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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하던 일 하나를 그만두는 바람에 다소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달라진 생활패턴이 익숙해지지 않고 뭔가가 뒤엉킨 느낌이기 때문이랄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부터 돌아오는 시간까지가 전에 없이 새로 생긴 공백이다. 이 시간을 ‘여유’라고 부르기에는 좀 사치스럽게 느껴져 민망하다. 아이들을 한참 길러내야하는 시기인지라 경제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지 않는 모든 시간들이 불편하고 죄스럽기까지 여겨지는 탓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좀 여유로워지면 반대로 생활은 위축되는 경향이 있어서 불안한 마음에 좀처럼 즐기기가 쉽지 않다. 생활은 이미 형성된 습관으로 굴러가는데 금전적인 뒷받침이 어느 순간 따라주지 않는다고해서 젖어있던 생활 자체를 멈추거나 방향을 선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중국인들은 5인 가족이 2천불로 생활한다는 말을 얼핏들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최근 10년 이내에 이민을 온 한국사람들은 생활 습성상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지난 ‘성장문답’의 칼럼 내용처럼,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은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무의식 중에 자유를 늘 금전적 여유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금전은 늘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에 자유감을 확대시킨다. 그래서 ‘생활의 여유’는 늘 ‘금전적 여유’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금전적인 위축은 자유의 위축으로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아주 못견뎌하기 때문에 삶 자체가 위축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금전과 과도하게 결부되어있긴 하지만 자유감 자체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그 자유감을 상하게 하는 방향으로 말한다면 옳은 말을 건넸는데도 불화살이 돌아온다. 부하직원이 실무와 현장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부장님, 그건 아니지요. 우리는 저리로 가야합니다.’ 하고 마침표로 끝나면 상사는 그의 말이 옳음을 직감하고도 자신의 자유감이 다쳤기 때문에 부하직원을 공격하게 된다. 그래서 부하직원이건 상사건 간에 서로를 대할 때는 뻔한 상황에서조차도 상대가 옵션(선택의 자유)를 가지게끔 해줘야 한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라든지 ‘이만저만하니 이렇게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라든지 물음표로 끝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막상 상대가 미우면 그렇게 매너있게 잘 되지 않는게 문제다. 쩝.

젊은 시절 어떤 소개팅한 여자와 어디를 같이 가기로 하고 지하철로 들어선 적이 있다. 나는 무심하게 엉뚱한 방향의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혹시 우리가 가기로 한 방향이 저쪽 아닌가요?’하고 물어왔다. 그것이 나를 배려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마음이 혹했고 그 여자는 결국 우리 세 아이들의 엄마이자 내 아내가 되었다. 촌뜨기가 서울 여시의 말재간에 홀린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어떤 남편은 자기의 경우를 떠올리고는 두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파는 시늉을 하더만. 어쨌거나 훌륭한 재간이었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도 자유감은 소중한가보다. 어제 큰 아이는 태권도 도장에 갔다가 승급시험 때문에 30분 길어진 것을 내내 힘들어했다. 그 시험을 레슨 시간 안에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까짓 30분 가지고 그러냐고 야단치기는 했지만 나름 불의의 상황에 소처럼 코뚜레로 끌려가는 느낌이 싫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점점 어른의 꼴을 갖추어 간다.

시간을 돈없이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은 Stoney Creek 도서관을 찾았다. 그래도 커피값 $1.70은 들었다. 2년이상 묵혀두었던 도서관카드를 갱신하고 밀린 벌금 2불을 정산하고 책 하나를 신청(hold)했다. 노트 한권과 볼펜하나, 그리고 책 한권 있으니 잠시였지만 자유감이 우주만큼이나 커진 것같은 착각에 빠졌다. 돈이 없어도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는 방법을 진작에 익혔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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