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차창 안으로 스미는 따듯한 기운이 심상치 않다. 오랜만에 햇살로 눈부시다. 주위에는 아빠들을 졸라서 밖으로 나온 몇몇 아이들이 세발 자전거 페달를 신나게 밟으며 휘젓고 있었다. 어지러운 뉴스들 틈에 잠시 깃든 평화로운 오후… 아직 잔디는 누렇고 나무가지는 앙상하지만 땅과 나무는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고 있다.
봄은 다가오고 있는데 사람들의 세상은 숨가쁘다. 불안과 두려움의 농도는 어제와 오늘이 벌써 다르다. ‘굳이 그렇게까지?’ 싶은데도 가게의 휴지는 동이 나고 식료품점의 선반은 비어간다. 대형마트나 식료품점 모두 문을 닫는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하는 것 같다. 우리 집은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2주 정도의 생필품을 점검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독감처럼 그것이 유행하고 있으니 이제 캐나다로, 런던으로 번지는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방역체계는 엉성한 수준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인지 확산의 속도를 늦추려는 주정부와 시당국의 각종 조치와 권고가 잇다르고 있다. 봄방학에 더하여 2주의 기간을 더 쉬게 하더니 이제는 국경도 닫고 주정부도 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왜들 이렇게 호들갑인감?’ 했었다. 사태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캐나다는 다소 넓찍하고 민족들간에도 모자이크 문화여서 바이러스가 퍼지는 양상이 유럽보다는 좀 낫기를 기대해본다.
확산을 막기 위한 비상 조치들은 나의 사적 활동 영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사를 비롯하여 주기적으로 가지던 단체행사와 소모임들이 모두 중지되고 서로 악수나 포옹도 자제한다. 특히 아이와 고령자들을 둔 가족들은 더 위축되어 있다. 그동안 반갑게 악수하던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바이러스의 불안한 그림자를 느끼는 것 같다. 보통, 가족끼리는 아무리 밖에서 바이러스가 유행한다고 해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같이 부대끼며 생활하다가 혹시 가족 중 누가 감염되더라도 체념하며 그냥 함께 감수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 바이러스의 경우에는 막상 해외에서 돌아온 자녀를 집으로 들일지 말지를 부모가 고민하게 되는 그런 고약한 면이 있다.
너도 나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당연한 덕목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몸 따로 영혼 따로인 존재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혼과 몸은 동전의 앞과 뒤처럼 하나의 존재가 가진 두가지 양상이다. 몸은 영혼이 벌을 받아서 갇혀있는 감옥이 아니고, 영혼은 마치 세일즈맨이 이도시 저도시의 모텔을 옮겨다니듯이 이번 생에는 이 몸 다음 생애는 저 몸으로 옮겨다니는 것도 아니다(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든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의 상태 역시 어떻게든 영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금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에는 효과를 보고 있다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마음 한편으로 서글픈 이유이다. 내 몸은 이웃과 격리되어 지낸다. 가끔 우연히 만나더라도 이제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 받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 그 전에도 이미 서로 모래알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좋은 태도를 애써 가지려는 의지를 통해 ‘젖은 모래알’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조만간 서로 ‘마른 모래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각종 행사가 취소되고 회의가 없어지고 만남이 줄어드니 몸이 편하고 한가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당장은 낯선 생활리듬으로 들어섰지만 몸은 금새 여기에 익숙해지고 어쩌면 이 생활을 점점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이 편하다고 마음마저 계속 평화로울 수는 없다. 오래 전 미국에서 머물렀던 생활을 마감할 무렵 나는 좋은 교훈을 얻은 적이 있다. 아내는 둘째 출산이 다가오는 바람에 두살된 첫째 아이와 함께 한달 정도 먼저 한국으로 출국한 적이 있었다. 몸이 편하고 한가한 것의 효익은 그리 며칠 가지 않는다.
‘성사’라는 다소 어려운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의 보이는 상징’이라는 뜻과 비슷하다. 그러나 보통의 상징은 그 실제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지만, ‘성사적’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실제 대상에게 효과(effect)를 발휘한다. 이정표라는 상징을 훼손한다고해서 실제 목적지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사적인 상징을 훼손한다면 그와 연관된 보이지 않는 실체도 훼손된다. 만약, 몸이 영혼의 성사라고 한다면, 보이는 몸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영혼에도 실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몸이 난잡한 성생활을 한다면 아무리 샤워를 많이 하더라도 영혼이 깨끗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힌두교처럼 개인 수련 종교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종교이다. 밀 알곡 하나하나가 부서지고 으깨어져 하나의 빵으로 합쳐지며, 포도 역시 알알의 열매가 모두 부서지고 으깨어져 하나의 술이 되고, 모인 자들은 이것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일치를 이루고 이 빵과 포도주와 하나의 ‘몸’이 되어 창조주에게 추수감사하듯이 바치는 것이다. 모래는 결코 빵이나 포도주가 될 수 없다.
영어로 ‘테스트’라는 말은 ‘시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얼핏 코로나는 마치 사람들을 바람이 겨를 흩어버리듯 뿔뿔이 자기 집으로 흩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테스트는 늘 취약점을 드러내고 장점을 다지게 한다.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요즘과 같은 일이, 모두를 허무하게 흩어져버릴지 아니면 지푸라기가 흩날린 자리에 단단히 고정된 닻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지 확신이 없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성실하다는 것을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나의 모습에서 가식과 위선이 있었다면 스스로에게 곧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난잡하게 지푸라기로 얼기설기 지은 위선의 집이 바람에 날아간 자리에서 몰랐던 머릿돌을 새로 발견하게 된다면 이것도 참다운 평화를 위한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