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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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방귀와 똥이야기만 나오면 꺄르르 한다. 그래서 막내와 자주하는 장난 중에 하나가, 방귀를 뀌면 그것을 잡아 던지는 시늉을 하며 ‘내 똥풍을 받아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남의 똥을 실제로 다루어보지 못했고 나 역시 기껏해야 내 자식들 똥기저귀 치운 것이 고작이다. 자기 자식의 똥이 역겹다 한들 얼마나 하겠는가. 그러나 남의 똥을 치워야 한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들, 숨쉬고 대소변을 하고 잠을 자는 것들 때문에 그토록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방문 간호사에게는 오랫동안 돌보아 온 중풍환자가 있었는데 항문 주위에 욕창이 생겨서 그것을 치료하러 방문하곤 한다. 치료 중에 환자가 괄약근 조절이 잘 되지 않아 방귀를 뀌면 간호사는 ‘들어올 때 인사했으니 또 안 해도 돼’ 라고 말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환자의 물똥이 튀어서 묻었다. 리얼 똥풍이었다. 보통 때 처럼 상처를 자세히 보며 치료하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더라면 큰 곤욕을 치를 뻔 했다. 그러나 다행이도 딱 한방울이 옷자락에 튀었다. 3년째 누워있는 그 환자 곁에는 돌보는 아내가 있는데, 남편은 늘 주눅 들어있어 보인다고 했다. 환자가 또 아내한테서 면박을 받을 까봐 얼른 화장실에 가서 부인 모르게 씻었다고 한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의 생생한 현장이다.

어느 수도회 신부님은 젊은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 나이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리라는 좋은 뜻을 품고 어느 겨울날 수도회에 입회를 하였다.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교육을 받고 다음 일요일에 처음으로 영등포 시립병원으로 일하러 나갔다. 서너 시간 동안 홈리스(행여자)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 병동은 간호사들 조차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얼굴이 시커멓고 머리에 이가 부글부글 끓고 동상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그는 눈앞의 광경을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갔다.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리고 영등포 시장 어느 곳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영화 한편 ‘때렸다’고 한다. 저녁에 수도회로 돌아왔더니 수련장 신부님이 잘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씻고 저녁기도를 하였다. 그때서야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일주일 후에 다시 그 병원을 찾았다.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결심하였지만 자신 앞에 벌어진 현실에서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한번 도망친 경험이 그 이후로는 아무리 심각한 병자 앞에서 똥 바가지를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다.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장 더러운 똥이 아름다운 꽃을 피게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거름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장미도 거름이 없으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연꽃도 더러운 진흙에서 핀다. 사람은 늘 편하고 안일하기를 꿈꾸지만 사실 우리의 영혼은 진흙 같은 현실로 이루어진 계란 껍질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사람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감자는 땅에서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좌절이라는 거름과 같이 썩어야 다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거름이 더 지독하고 똥에 가까울수록 열매는 더 달다. 그리 믿고 싶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더러운 말 여물통에 나약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모두를 대표하는 모습일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진창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그의 똥풍을 반가운 인사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에는 돌봄이 따르고 그것은 시나 소설의 세계보다 훨씬 날것이고 비린내를 풍긴다. 중풍으로 누워 있는 자기 가족을 돌보기도 힘든 세상에 남의 그러한 고통스런 삶을 (일부) 감당하려 결심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무슨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입으로 하는 좋은 말을 듣더라도 해당되는 삶을 본인이 살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서는 진정성이 느껴져 감화를 받게 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위선이 느껴져 경멸하게 된다. 위의 어느 수도회 신부처럼 내 말이 곧 내 삶을 담아내는 인생을 살고 싶어 의연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남의 똥바가지를 뒤집어쓰는 길을 걸어오지 못했기에 장미도 연꽃도 피우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 그릇으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한 발을 지금 내 대딜 수는 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조금 후미진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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