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지진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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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선선해지고 있는 저녁, 북쪽 국도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 전에 해가 넘어갔다. 들판은 온통 땅거미로 가득하고 하늘은 이제 빛의 기억만 머금고 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여름 뒤로 계절은 가을 문턱에 접어들고 있다. 비가 갠 다음이라서 그런지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고 어두워져 가는 서쪽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드문드문 시원하다. 먹구름도 아닌데 갑자기 구름 속에서 번개가 소리없이 번쩍인다. 마치 어느 신적인 존재가 구름 속에서 호통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

구약성경 속에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엘리야라는 인물이 산 속의 동굴에서 겪는 체험이다. 그는 군중 앞에서 예언자로서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광야로 피신을 하는데, 죽을 고생 끝에 결국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리던 호렙 산에 도착하고는 어느 동굴에서 하룻 밤을 지낸다. 거기서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하느님은 없었다. 다음으로 지진이 일어났지만 그 속에도 없었다. 그 다음에는 큰 불이 지났지만 그 불 속에도 없었다. 그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해서 프랑스 알프스 산 중턱에는 ‘카르투시오’라는 침묵 수도원이 생기기도 했다.

구약 성경에 ‘하느님이 노하여 천둥이 치거나, 전쟁에 패하거나, 역병이 퍼졌다’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신에게 감정의 기복이나 갱년기가 있을리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표현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오랜 기도와, 그릇된 것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우리 조상들은 남성의 평균 수명이 서른 몇 살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전쟁과 역병 등의 시대적인 모진 풍파를 겪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세대는 기껏 해봐야 이념적인 투쟁들 밖에 없을 정도로 드물게 평화로운 세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전쟁처럼 치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상이 마비되는 희한한 현상을 모두가 겪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숨가쁘게 달려온 삶에 찾아온 선물같은 휴식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늘 있어왔던 다사다난한 인생사 중 하나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중대한 시대적 변곡점으로 다가왔다.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나는 모르지만, 변함없는 마음가짐으로 인생의 파노라마에 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통장에 돈이 없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건강을 잃는 것 역시 우리에게는 바위를 부수는 바람과 땅이 흔들리는 지진, 혹은 주위가 뜨거운 불에 타는 것처럼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건강의 위협 앞에서는 모두가 노심초사할 수 밖에 없다. 건강을 잃으면 그동안 향유하던 그 모든 것들을 중단해야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생명을 영영 잃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위기에서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그런 무심하고 무능한 존재를 왜 믿어야 하냐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요란한 역병은 서쪽하늘 뭉게구름 속의 번개나, 엘리야가 동굴에서 들었던 바람소리와 지진과 불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목소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본능적으로 털을 곤두세우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람의 친구라는 개나 고양이조차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면 주인일지라도 물어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고의적으로 해치려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개나 고양이의 목숨과 나의 목숨이 비슷하다면, 즉 개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듯이 사람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면 지금 당장의 ‘건강’ 이상의 고귀한 가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최고선’ 자리에 놓은 성인은 일찌기 없었다. 사람의 생명은 건강을 넘어서는 뭔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과 생명은 밀접하지만 서로 좀 다르다. 내 손가락은 잘려져 나갔을 때 이미 잘려진 손가락에는 내 생명이 더 이상 없다. 내 손목이, 혹은 내 팔이, 내 하반신이 잘려서 나와 분리되었다면 거기에도 더 이상 나의 생명이 없다. 나아가 내 목이 잘린다면? 어쩌면 내 생명은 머리에도 목 아래 몸둥이에도 없고 다른 어느 곳에 그래도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그 어떤 악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는 육신이 손상되거나 없어도 ‘나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런 깨달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엘리야를 본받는 수도회 중에 ‘가르멜 수도회’가 있다. 그 중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라는 분이 있는데 그는 “이 땅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조차도 어쩌면 하룻밤 불편한 여인숙에 묵어가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여인숙이 아니라 운 좋게 오성급 호텔에 묵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아침이면 어짜피 떠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지나가는 다리 위에 집을 짓지 않듯이, 하룻밤 묵어가는 여인숙이나 호텔 방을 꾸미려고 새로운 가구를 사들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건강을 잃은 나의 육신도 하룻밤 불편한 숙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했다. 식구들이 집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 자기의 일에 몰두하느라 나를 반기지 않을지언정 이 집은 ‘하룻밤 여인숙’은 아닌 느낌이다. 광풍과 지진과 불이 우리를 짓밟고 지나가더라도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어도 내 생명은 다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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