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워…”
거의 완성된 테이블을 훑어본 아내의 첫 반응에 나는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 해에 기껏해야 한두 개 정도 테이블을 만들다 보니 제작할 때마다 늘 낯설다. 어떤 나무를 사용할지, 어떤 도구을 사용해서 어떤 방식으로 붙일지 또 무슨 재료로 마감할지 등을 먼저 고민하다보면 할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게된다. 거기다가, 한정된 예산과 제한된 도구와 빈약한 상상력과 서투른 솜씨 때문에 결국에는 흠이 생기고 만다. 한단계 한단계마다 예상치 못했던 실수가 생기고 그것들을 바로잡거나 메꾸는 시간이 전체 제작 과정에서 거의 반이나 차지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잘 바로잡히지 않는 흠이 그대로 남았다. 아내는 작품에 잔뜩 기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흠을 내내 아쉬워했다.
공부를 곧잘 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이를테면 98점)을 받아오면 ‘2점만 더 받았으면 100점이 되었을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든다고 한다. 틀린 문제를 살펴보니 평소 모르는 문제도 아니고 그냥 아이가 단순히 실수한 것이다. 딱 2%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98%를 잘 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마음은 자녀가 ‘옥’처럼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자녀 같으면 그냥 감탄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나에게 귀한 옥이기 때문에 그 티가 더 거슬리는 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지나치다 보면 다음에 더 잘하라는 의미로 회초리마저 든다는 소문을 간간히 듣는다. 다 자녀를 위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나름 주어진 환경과 역량의 제약 하에서 정성과 노력을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2점 때문에 야단맞는 자녀가 된 기분이라며 서운함을 토로했더니 아내는 나무와 디자인과 색감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흠이 더 돋보였던 것이라고 나를 짐짓 다독여 주었다. 예전같으면 내가 삐져 대판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서로 왜 그런 심정이 들었는지 얘기하고 들어주는 선에서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에 아내는 (우리 집에서 제일 지혜로운) 둘째 아이에게 낮에 나와 있었던 일을 얘기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처음에는 큰 그림에서 먼저 잘된 부분을 칭찬하고 노력을 치하해라, 그 다음에는 아쉬운 부분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칭찬으로 마무리해라”는 식으로 조언했다고 한다. 평가의 정석과도 같은 조언이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내가 최소한 그 당장은 그냥 전체적으로 ‘감탄’만 해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록 흠이 여기저기 발견되었더라도 말이다. ‘잘했다’라는 칭찬도 필요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잘했다라는 말도 그 반대말이 ‘못했다’인 것을 보면 은근히 평가가 들어있는 말이지 단순한 감탄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우와’라는 식의 감탄만 해주어도 충분한 교육효과가 있다고 한다. 흠과 아쉬움은 그 일을 직접한 장본인이 가장 잘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 자녀 앞에서 결과를 놓고 당장 뭔가 지적해주려는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감탄’만을 받아먹을 나이는 이미 지났다. 처음에는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없는 것 같아서 아내의 직설적인 피드백이 서운했지만 사실은 그런 평가가 흠을 어떻게든 어찌저찌 메우도록 채찍질 하기 때문에 완성품에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능력이 뛰어나고 자존심이 강한 사내라면 그저 감탄만 해주는 배우자가 더 도움이 되겠지만, 내 경우에는 역량은 부족한데 자존심만 강하니 아내의 거칠고 솔직한 평가가 내 자존심에는 스크래치를 내지만 완성품에는 결국 도움이 되는 편이다. 제작과정은 몰라주고 고객처럼 제품의 흠만을 지적하는 아내의 태도를 문제삼을 형편은 아닌 것이다. 내 서운함의 토로는 어쩌면 소심한 자의식과 못난 솜씨에 대한 스스로의 아우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약간이라도 흠이 있을 때 그것을 깨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도자기 장인같은 고집과 정성은 애초에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좋은 교육에는 늘 평가가 따른다. 비싼 교육일수록 더 그렇다. 나는 우리 삶도 완성을 위한 하나의 교육과정이라고 믿는다. 내 삶이 귀할수록 마지막에 평가가 꼭 따를 것이다. 어떤 길이 분명한 목적지로 이른다면 그 길은 항상 관리되겠지만, 끝이 막다른 길이라면 잡초로 무성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삶의 끝에는 평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현재의 삶을 더 성실하게 가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과 달리 2% 부족하다는 이유로 깨져버리는 도자기같은 신세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니, 맘 편하게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삶을 제작(?)해가면 되지 않을까 한다.
아침 저녁으로 가을 공기가 신선하다. 계절이 바뀔수록 육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의 몸으로 노동하기보다는 남이 하는 노동에 입으로라도 도우려는 심정으로 자꾸 남의 작품을 ‘평가’하고 ‘조언’을 하게 된다. 내가 귀하게 생각하는 가까운 사람에게 더 그렇다. 그럴수록, 2%를 예리하게 지적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 입을 닫고 98%를 감탄해주는 단순한 노인으로 늙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