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복지의료 ‘메디케어’의 탄생 – 58년 전 캐나다도 ‘의사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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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전 캐나다에서 벌어진 의사 파업은 지금의 한국 상황과 비교해 낯설지 않다. ‘메디케어 확대를 저지하려는 의사들이 전면 파업에 나섰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북미에서는 의료 ‘자유주의’ 형태로서 국가가 의사의 개별적인 임상판단에 개입하지 않아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보건의료는 상품이 아니라 ‘공공선(public good)’이며 시민의 권리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국가가 나서서 의료를 보장하는 복지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의사와 국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충돌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62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서 일어난 건강보장 확대와 이에 맞선 의사들의 파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건강보장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대초원 지역 중 하나인 중부 내륙의 서스캐처원주는 경제발전이 뒤지고 드넓은 농촌지역에 인구도 적었다. 시장을 통한 의료서비스 제공이 원활치 않아, 주민들은 의료 이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서스캐처원은 북미 대륙을 통틀어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처음으로 집권(1944년)한 지역이 된다. 캐나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 ‘메디케어(Medicare)’가 태동한 곳이다.

1944년 주지사로 당선된 토미 더글러스는 1947년 서스캐처원에 보편적 병원보험을 도입했다. 당시 캐나다 병원들은 대부분 비영리 종교단체 소속으로 대다수가 재정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정적인 정부지원금이 절실했다. 의사들도 심각한 진료비 체납 문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던지라 공공보험 도입에 우호적이었다.

서스캐처원에서 병원보험이 성공하면서 다른 주들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다. 연방정부가 움직이면서 1957년에는 ‘전 국민 병원보험법’이 통과되었다. 오늘날 ‘메디케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미 더글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외래 진료비까지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건강보험제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의사 집단의 협력을 받기 위해 1960년 4월, 주 의사협회 대표자들을 포함하는 ‘메디케어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합의안을 도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950년대를 경과하면서 메디케어에 대한 의사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주 의사협회는 자문위원회 내부에서 지연 전략을 구사하며 ‘정부의 직접적 보험 제공’이 아니라 ‘민간보험에 보조금 지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협회는 1960년 주의회 선거에서 ‘메디케어 확대 저지’를 슬로건으로 총력전을 벌였다. 서스캐처원은 말 그대로 ‘북미 대륙 전체의 전쟁터’가 되었다. 주 의사협회는 메디케어 확대 저지 운동을 위해 의사 1인당 100달러의 후원금을 걷었다. 캐나다 의사협회의 후원도 받았다. ‘사회주의 의료’가 미국으로 전파될 것을 우려한 미국 의사협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1960년에 지출한 저지운동 자금 9만5000달러는 당시 메디케어를 추진하던 캐나다 여당(CCF)과 야당 자유당의 선거자금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캐나다 의사들은 건강보장 제도 도입을 오랫동안 저지해온 미국 의사협회의 노하우도 전수받았다. 신망받는 의사들을 키맨(key man)으로 두고 10명 단위로 소모임을 관리하며 이탈자를 방지했다. 의사와 시민들에게 배포할 홍보물과 키트도 제작했는데, 핵심은 메디케어가 ‘의료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홍보물에는, 메디케어가 확대되면 주민들의 의사 선택권이 박탈당하고, 정부가 강제로 낙태수술을 하며, 의사들이 모두 서스캐처원을 떠나 실력 없는 의사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런 노력을 했는데도 1960년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주의자들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정부는 이 결과를 ‘주민들의 메디케어 지지’로 해석하며, 정책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의사 측은 자신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주정부는 제한된 조건에서 의사들이 주도하는 민간 의료보험을 허용하고, 메디케어 바깥에서 환자에게 직접 청구하는 것도 허용하겠다는 양보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정부 양보안이 법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거부하며 자신들의 최종안을 제시했다. 정부가 민간보험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의사들은 모든 환자들에게 직접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면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1962년 5월, 주의 전체 의사 900명 중 약 600명이 참여한 긴급총회 이후 의사들은 실제로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다. 메디케어 확대를 지지하는 노동조합과 교회, 시민사회 단체도 많았다. 그러나 주지사는 사회적 갈등 격화를 피하기 위해 맞불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사협회는 이런 상황을 두고, ‘반대 세력이 미미하다’라고 오판했다. 의료보험법이 발효되는 7월1일, 의사들은 전면 파업에 나섰다. 응급 서비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서스캐처원 지역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외 언론들은 의사들의 결정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보건의료 개혁 조치에 반대할 권리가 의사들에게 없으며, 파업에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메디케어 확대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의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의학 학술지 〈랜싯〉마저도 의사협회가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비판 논설을 냈다. 주정부는 계속 협상과 양보 의사를 밝혔지만 의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7월11일 의사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대중 집회가 실패로 끝나고, 의사들이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파업 동력을 상실해갔다. 주정부는 영국 국립보건서비스 설립에 관여했던 의사이자 노동당 정부 각료였던 스티븐 테일러 경을 초빙하여 중재를 맡겼다. 의사들의 신망이 높았던 테일러 경의 중재가 성공하면서 7월23일에 ‘사스카툰 협정’이 체결되었다. 23일 만에 파업이 종결된 것이다. 의사들은 메디케어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데 합의했다. 그 대신, 정부는 의사들이 주장해왔던 선택권, 즉 의사들이 메디케어 바깥에서도 진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행위별 수가제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출처: 시사IN, 김명희) 원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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