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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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코로나 상황은 좀 나아진 것일까? 그러나 아직 공기의 흐름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마음도 아직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다. 공원에는 드문드문 조심스럽게 작은 모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입단 선서를 한 젊은 친구들과 뒷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고기굽는 것을 도왔다.

세파에서 벗어나 집콕하는 자유로움도 하루이틀이지, 이제는 밖에서 사람 냄새를 맡고 싶을 때가 되었다. 외로움을 달래거나 자랑거리를 뽐낼 자리가 필요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찿는 사람도 있겠지만, 혼자 가슴에 품고있던 ‘뜻’을 살포시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는 사람도 있다. 함께할 때 서로 나눌만한 같은 ‘뜻’이 없다면 친교의 즐거움은 각자의 피부 안에 갇힌다. 그리고 겨울 들판에 잠시 핀 모닥불처럼 쉽사리 사그라들고 말 것이다.

신체에 얼굴이 있듯이 정신이나 넋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어떤 얼굴이 있다고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얼굴을 ‘얼’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얼굴을 보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얼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의 정신이나 넋을 모두 알지는 못해도 많은 부분을 대표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이 사람의 신체를 대표하듯이 얼도 사람의 정신을 대표하는 셈이다. 사람이 품은 뜻이 깊을수록 그의 얼은 향기처럼 더 진하게 읽힌다고 한다.

스치는 모든 인연과 친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느낌적인 느낌으로 호감이 갈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의 얼굴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 나와 비슷한 얼을 탐지하게 되면 어쩔 수 없는 호감을 느낀다. 단순한 얼굴에 대한 호감은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지만 얼에 대한 호감은 도원결의로 이끌기도 한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지난 시대보다 오히려 더 깊은 고립감에 빠진다. 서로 뜻이 달라서 각자의 얼이 낯설게 읽혀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 같이 나눌 뜻이 아예 없이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현대인들은 정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얼이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아보고 그 이름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정신적 얼굴은 점점 식별하기 어려워져 간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욕구가 길러지고 소비도 표준화되어 비슷한 모습으로 만났다가 이름 없이 잊혀져 간다. 우리 낱낱의 정신세계는 어쩌면 얼굴 없는 공산품의 처지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공산품은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사용될 뿐이다.

뜻을 품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만큼 주위에는 즐길거리가 즐비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텅빈 객석에 남아’있지 않아도 될만큼 다른 연극들이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다. 취미활동으로 바쁜 탓에 내 본연의 얼굴을 찾을 시간이 없다. 그러다보니 누가 내 얼굴과 비슷한지도 알지 못한다. 고립감은 오락이나 취미활동보다는 사람과의 교감으로 해결해야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지만 정작 본인들은 바빠서 고립감을 느낄 시간이 없다.

금슬이 좋은 부부의 얼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닮아간다기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이라는 게 더 그럴듯한 가설일 것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와 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우리가 뱀이나 지네 등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고 혐오하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우리와 너무 달라서 ‘의인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인화하지 못하는 동물에는 정감이 가지 않는다. 정신적인 교감도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 교감하더라도 취미에 빠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원초적’인 고립감마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옹기장이처럼 내 얼굴을 옹기처럼 빚어낸 근본적인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서 존재론적으로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에게 존재를 부여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의 뜻과 얼에 일치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을 줄 것이다. 그런 존재가 없다면 인간은 우주 최상위 존재로 격상될 터이지만 그저 측은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늘 아래 사는 버섯같이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나 이왕 바깥 햇빛 아래에서 모인다면, 단순히 취미만을 같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뜻과 얼을 같이하면 더 보람있을 것 같다. ‘축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쩌다 바라게 된 것의 충족이나 주관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올바른 욕구가 차지하는 올바른 만족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 함께 한 젊은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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