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보통 하늘 나라, 하느님 나라, Kingdom of God, 때로는 새하늘과 새땅(신천지!!)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모두는 죽어서 막연히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치듯이 할 때가 있다. 옛날 계로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일반적 시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통계적으로는 4대 종교(기독, 이슬람, 힌두, 불교)만 합쳐도 202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75%를 차지하고 기타 종교를 더하면 인류의 85% 정도나 되는 인구가 겉으로는 내세를 믿고 있는 셈이지만, 체감적으로는 모두가 그저 공자의 시각이 가장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며 현재의 일상과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내는 데에 치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쿼바디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행선지를 아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리고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의 가사처럼,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다리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지으려고 다들 애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다리 너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기차여행으로 치자면, 각자 다른 역에서 기차에 오른 승객들이 지정된 칸의 좌석에서 옆사람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다가 ‘근데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문득 물었는데 ‘글쎄요… 모르겠는데요.’라는 답을 듣는 경우와 같다. ‘당신은요?’ ‘저도 사실 어쩌다가 올라탔습니다. 우리는 공통점이 있네요. 다른 이야기나 합시다.’ 행선지를 모르는 지금의 삶에서 안정이란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상을 거부하고 평화를 찾으려는 자는 결국 다시 묻게 된다. 쿼바디스?
만약 천국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전부라고 치자. 그러면 지금 현재의 모든 종교는 가짜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예수는 사기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만약 천국이 ‘쿼바디스’라는 물음의 답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이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을 위한 자궁, 하룻밤 편한 (혹은 불편한) 숙소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두려운 죽음을 맞는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 된다. 누가 알겠는가? 그 때 우리 모두는 마치 아기가 자궁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듯이 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를 맞이하게 될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 내 아들은 ‘1 아니면 0인 것 같아요’하며, 자기는 1일 가능성이 좀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뜻일까? 어쨌든 컴퓨터 프로그램에 익숙한 세대다운 비유라고 생각했다. 컴퓨터로 구현하는 모든 놀라운 프로그램들은 사실 근본적으로 ‘1아니면 0’으로 짜여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이 만들어 내는 희로애락도 어쩌면 1아니면 0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 삶에서의 모든 의지, 애착, 지식, 성과를 1에 곱하면 모두 그대로 남게 되지만, 만약 0에 곱하면 모두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내 식으로 예를 들자면, 죽음의 결과는 무한대(∞) 아니면 0이다. 천국이 있을 가능성이 백만분의 1밖에 되지 않고 천국이 없을 가능성이 나머지 모두라 해도, 결과적으로는 무한대 곱하기 백만분의 1은 역시 무한대가 되지만 0에다가 99.99%의 가능성을 곱한다 하더라도 0일뿐이다. 백만불의 1밖에 되지 않는 희박한 확률이지만 거기에 베팅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는 셈이다.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지상의 감옥에서 창살 밖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창살 밖을 볼 때 하늘의 별을 보는 사람도 있고 땅의 진흙을 보는 사람도 있다. 창 밖의 세상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현실도피일까? 그러나 종교의 창립자가 가르쳤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분명 감옥을 넘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를 통해 접하는 그 후계자들의 설교는,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방편으로서의 신앙이든 정치적 혁명을 가져올 신학으로서의 신앙이든 어쨌든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더 자주 가르친다.
막상 삶의 번영과 정치적 혁명이 주는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 스웨덴의 자살률이 하이티 섬보다 천배나 더 높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번영은 지루함을 낳는 법이다. 혁명 역시 혁명 이전에는 가장 고귀한 가치로 보이지만 막상 성공하면 그 성공 자체를 넘어서는 경우가 드물다. 혁명은 흔히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부르게 된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는데도 삶이 이상하게 불만족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을 수록 이상하게 그렇다. 인간에게는 감출 수 없는 비극적 진실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가슴에는 천국의 크기만한 구멍이 있어서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거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그랜드 캐년 만한 골짜기에 자갈을 채우려고 일생을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진실이라면 인기가 없는 진실일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위해 평소 애쓰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예언자에게 돌을 던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구멍을 가슴에 안고 산다면 천국을 동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내 존재의 무게는 내가 가진 사랑의 무게만큼이고 내 심장이 느끼는 그 무게가 무거울수록 중력의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사랑의 근원인 천국으로 이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 천사가 푹신한 구름 위에서 나팔을 불고 있는 곳이 아닌) ‘어떤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떤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도 상상해 본 일이 없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신이 마련해 놓은 뭔가’를 심장은 동경하게 된다.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도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을 진정 사랑했던 성인들의 삶을 보면 그들은 지상의 삶에 정열을 다 기울인다. 마치 고국을 사랑할 수록 이민자들이 타지를 최대한 고향 같은 곳으로 개척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낙태를 마음 먹은 여자와 달리, 태아를 산 채로 나으려는 산모는 임신기간에 태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기 마련일 것이다. 삶이 천국을 향한 여행길이라면 현재의 삶은 목적지의 영광이 길 곳곳에 기대와 희망의 모습으로 반영이 된다.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하수구에 쓸려 사라질 뿐이라면, 현재의 삶은 아무리 편안해 보려고 애를 써도 흙탕물의 소용돌이로 보일 뿐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문을 정직하게 응시할 때 내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옵션은 바로 무한한 기쁨을 누리느냐 아니면 무한한 우울에 빠지느냐이다. 천국에 입장권이 있을까? 놀랍게도 무료라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괄시 받고 있는 것 같다.
<후기: Peter Kreeft (Boston College 철학 교수)의 유투브를 듣고 난 소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