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남기고 떠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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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떨어진다. 지인의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흔한 병이었던가! 우리의 생명은 마치 미약한 심장이 보조장치로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늘 죽음과 위태로운 동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교체가 불가능한 그 장치의 밧데리가 언제 닳을지 몰라 불안하지만 몇 년 동안 괜찮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것이라는 무딘 낙관을 뒤로하고 오늘도 새로운 곡식 창고를 짓느라 하루를 바삐 흘려 보낸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sufferings)은 우리의 삶에서 주로 악한(evil)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고통=악’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무고한 어린 내 자식이 혹은 선했던 내 남편이나 아내나 친구가 필요 이상의 고통을 당하면서 품에서 죽어갈 때 그 상황을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세상에는 정의가 없음을 절실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악이 승리하는 드라마에는 정의가 없다. 정의가 없다면 신도 없는 것이다. 도를 지나치는 고통의 존재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억울한 고통에 내몰려 죽어간다면 끝까지 무고를 주장하거나 세상에 분노하거나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자들을 악을 쓰며 저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해나 불치병으로 당하는 고통은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그냥 만물의 이치가 그러려니 하면서 결국은 심리학이 권유하듯이 자신의 죽음을 체념하고 수용하고 말까? 삶은 고통이 보상받지 못하고 결국 죽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막장 드라마란 말인가?

자신이 겪는 고통이 무의미하다면 그만큼 절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유태인 포로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읽은 사람들의 생존율이 눈에 띄게 높았다.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수명을 영원히 연장시키지는 못한다고 해도, 무의미는 죽음의 편이고 의미는 생명의 편이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의미를 깨달으면 고통이 좀 덜해지고, 절망 대신 희망이 들어서고, (소경과도 같은) 심리학도 덜 찾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현인의 말에 의하면, 진정 참기 어려운 고통이란 무한을 위해 만들어진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유한에 가두려고 하기 때문에 온다고 한다. 정의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유한한 고통의 커튼 너머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한한 행복에 그 고통이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당장의 고통은 의외로 참을만할지도 모른다.

사실, 육신의 통증은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심해지다가 어떤 선에서 아픈 정도가 멈춘다고 한다. 고통에 내성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빨리 어떤 지점까지 도달하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 계속 고통을 참게 된다. 병상에서 몇 달을 투병하고 있는 가운데 일년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그래서 몇 년을 버티곤 한다. 아무리 큰 고통도 어차피 이 지상에서 모두 소진해버린다.

그런데 쾌락은 아무리 누려도 어느 지점에서 멈출 줄을 모른다. 만족을 모르는 채로 끝없이 열려 있다. 오히려 쾌락은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갑자기 고통으로 변한다. 그 이후에는 더 큰 자극이 있어야 하고 결국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쾌락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쾌락도 고통처럼 이 세상에서 모두 소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YOLO족이 되어 가급적 더 많은 쾌락에 탐닉하려고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희망이 없다. 지상의 어떤 것도 결국 우리의 쾌락을 다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쾌락이 무한으로 뻗어 있고 그래서 무한한 세상에서만 진정으로 그 쾌락(혹은 행복)이 만족된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물질적 풍요와 누림에서 쾌락의 완성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유한한 것들을 낙엽처럼 하나하나 흘려버리고 무한 속으로 자신의 존재를 집어 던지는 일일 것이다.

무한이 없는 사람의 고통은 절망스럽다. 물질적 풍요와 그것을 누릴 육신의 건강이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소유의 철학’은 결국 막다른 무의미의 골목에 들어선다. 그러나 유한을 흘려버리고 존재를 무한으로 던지는 ‘존재의 철학’은 지상의 날것 같은 고통에 천상의 기쁨이라는 반창고와 붕대를 감아 줄 것이다.

간혹,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이 세상을 정화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나의 고통이 타인을 낫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자기위안 끝에 찾아온 망상일까? 그런데 만약 너와 내가 남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로운 몸이라면 이런 관점도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 얼굴이 화상을 입었을 때 치료를 위해 같은 몸의 등짝 피부를 이식하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치유(reparation)를 위해 사용 가능하다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나의 고통이 내가 모르는 굶주린 이에게 빵으로서 바쳐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혹은, 내가 흘리는 피가 그냥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수혈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고통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과 분노를 다른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제물로 바칠 수 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납득하게 된다면 참으로 위안이 되는 의미의 발견일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아이에 대한 어미의 희생처럼 대상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한 몸이 되게 한다. 아픈 아기 아래에서 발에 입맞추며 기꺼이 대신 피흘리고 싶어하는 엄마의 헌신을 보면 그것이 아기의 고통을 당장 없애지는 못하지만 신비한 방식으로 엄마는 아이의 고통에 참여하며 치유를 돕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꺼이 상대방의 고통과 고뇌를 함께 짊어질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사랑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위해 누가 목숨을 바쳤다 해도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비극인 것이 아니라 고통을 대신 짊어질 대상이 없기 때문에 더 비극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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