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12) – 레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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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레베카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 본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노란색의 미끄럼방지 양말을 신긴다. 유난히 발이 작다. 이렇게 작은 발을 가진 백인을 본 기억이 없다.

“If you don’t use it, you will lose it (움직이지 않으시면, 근육의 기능을 잃게 될 거예요.)”

나의 잔소리에 92세의 레베카가 끙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보다도 작은 키. 본래부터 아담했던 체구였지만, 햇수가 거듭할 수록 조금씩 더 키가 줄었던 거겠지. 레베카가 나의 팔짱을 가볍게 끼고 지팡이나 보행기의 도움 없이 복도를 걷는다. 처음 몇 발자국은 조금 흔들렸지만 레베카의 걸음 걸이는 단단했고 보폭도 안정되었다.

레베카는 처음에는 근육이 놀랐겠거니 라고만 생각했다. 아침에 시작된 왼쪽 갈비뼈 부근의 통증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 즈음에는 속이 메스껍고 답답하여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갈비뼈 쪽의 통증이 등쪽으로도 번졌다. 식은땀이 나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생각에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서둘러 911에 전화를 해 구급차를 레베카 집으로 보냈고 레베카는 딱 맞는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텐데, 간단한 스텐트 (Stent) 시술로 레베카의 심장은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이틀 정도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심장과 팀은 레베카가 퇴원을 해도 좋다고 했다. 스텐트 시술 후에 흔하게 겪게 되는 오른쪽 팔목의 꽤 커다란 멍자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후유증은 없어 보였다. 심장 기능도 그다지 저하되지 않았고 흉부통 같은 증상은 전혀 없었으며 심장맥박과 혈압도 정상이었다.

레베카는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료진의 말에 많이 기뻤다. 노인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후두 신경 조절 이상으로 인해,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우는 사람처럼 떨리는 것만 빼고는, 처음 레베카를 만난 사람들에는 그가92세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는다. 레베카는 기억력이 또렷하고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청력이 정상인데다 더이상 운전을 하지는 않지만, 작은 콘도에서 여전히 집안을 돌보고 요리를 하며 혼자 살고 있다.

레베카는 혼자 사는 것이 좋았다.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친절한 이웃들이 자주 안부를 물어오고 허드렛일들도 자진해서 거들어준다. 두 집 건너 사는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로 잔디를 깎고 눈을 치워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다행이다. 미풍에도 흔들릴 수 있는 나이라지만,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자신이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사고로 잃은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직도 아파도, 하나뿐인 딸이 무척이나 살갑다. 50여년의 결혼 생활 후 남편은 2008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어떤 분이었는지 내가 묻는다. 레베카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린 후,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원을 만든다. 그리고 “He was just perfect and I was so lucky.”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레베카의 퇴원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 독립적인 사람이지만 막 심근경색을 겪은 이후라 도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병실 의자에 앉아 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레베카가 내게 종이 쪽지를 건넨다. 연필로 꼭꼭 눌러 쓴, “천사들에게”로 시작되는 레베카표 감사 편지다. 레베카를 돌봐 준 간호사들의 이름을 모두 적은 후, 그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메모다. 레베카가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통틀어 불과 네 시간 정도 그의 간호사였을 뿐인데도, 너무너무 고마웠고 그 친절을 잊지 못할 거라고 내게 말한다.

나는 8년 동안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다 왔는데, 실은 그 8년 동안 들풀처럼 자라나던 수많은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웠고 그들 덕분에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돌보지만 실은 자주 환자들로부터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언젠가 레베카처럼 삶의 끝자락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라고.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의 대사)

(위의 글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색하였으므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사실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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