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되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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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토론토의 봄을 기억한다. 캐나다 삶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랜딩한 다음, 토론토의 어느 작은 공원 옆 아파트에서 캐나다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갓난 아기의 눈에 비친 세상처럼 캐나다의 모든 것이 새로울 무렵이었다. 마침 같은 층에는 어떤 젊은 한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알에서 깬 새끼 기러기가 처음 만난 생물을 어미로 받아들이듯, 우리 가족의 첫 정은 그들에게 향했다. 그렇게 몇년 알고 지내다가 그 부부는 중국으로, 우리는 런던으로 왔다. 거의 10년이 흘렀다. 그러다 최근에 카톡을 통해 소식이 왔다. 다시 캐나다로 들어와서 토론토 인근에서 살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끔 토론토에 가는 길에 들러서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인생의 길목에서 여러 인연들을 만난다. 그렇지만 그들의 상황과 지위와 능력과 성품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거침없이 열어 전적인 신뢰를 주게 되는 그런 상대방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선한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더라도 결국 그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혹은 내가 실망을 안길지도 모른다는) 한 줌 의심은 늘 보험처럼 마음구석에 남겨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드문드문 빗장을 모두 해제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데 내 경우에는 뭔가 삶의 새로운 국면에서 마음이 ‘초기화’되어 있을 무렵에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세상에 처음으로 의식의 눈을 뜨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에는 옆에 부모님과 형과 누나가 있었고, 외로운 사춘기를 거치고 모든 것이 낯선 서울에서 기대와 두려움으로 신입생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주위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있었으며, 결혼이라는 미지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옆에 아내와 아이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토론토에 처음 랜딩했던 그 당시에도 내 마음은 어느 정도 초기화되어 있었나 보다.

요즘은 몇몇에게만이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빗장을 해제하고 싶은 (비현실적인) 바램이 생겼다. 설사 그가 나를 고문하는 상상속의 인물이라거나, 뉴스에 나오는 뻔뻔하고 음흉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 개인을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이루어지듯이 세상 일 하나하나가 나도 모르는 어떤 계획이나 관찰 아래에서 정밀한 섭리의 조각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싶은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정의와 자비같은 것이 공기 중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태도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전류를 감지하려면 어떻게든 구리 옷을 구해서 입어야 할 것이다. 그리되면 아무리 맹독의 뱀들이 발밑에 기어다녀도 전류의 도움을 받아서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전류가 머리 위 공기 중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다. 가끔 나는 해괴한 상상실험을 하는데, 모든 사람들의 머리가 잘려나간 채 몸만 걸어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평소 욕망했던 많은 것들, 이로 인한 두려움과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와 교만이 많이 누그러지게 된다. 몸매가 날씬하건 뚱뚱하건, 키가 훤칠하건 땅딸보이건, 멋진 옷을 입었건 남루하건, 좋은 집에 살고 있건 토굴 속에 살고 있건, 동양인이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간에 그 차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단지 다양한 몸둥아리들이 다만 여러 시대에 걸쳐서 다양한 지역에서 분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놀랍게도 몸에 머리와 얼굴을 붙이는 순간 자연계의 다른 모든 종들과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강아지나 나무와 달리 군집과 구별되는 개인(person)이 된다. 머리 아래로는 흙에서 나온 자연의 몸이지만 머리를 붙이는 순간 사람의 머리는 하늘에 닿는다. 아무리 정교하게 사람의 머리를 제작하고 그 안에 뛰어난 성능의 AI를 넣는다 한들 그 머리는 하늘에 닿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델명이 붙을 뿐이겠지만 사람은 ‘알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고 그 사랑한 것을 선택하는’ 개인이 된다. 그에게는 저마다 이름이 생기고 온갖 욕망이 불붙고 그 이름 아래 각자 뭔가 기록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부도 생긴다.

간혹 우리들 중 몇몇은 하늘에서 정의와 자비가 바람같이 스치고 있음을 뇌세포로 느낀다는 소문이 있다. 뇌세포가 안테나같은 기능이면 그러한 개념(정의나 자비)들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나 밖의 제 3지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뇌세포가 그냥 희박한 확률로 어쩌다 만들어진 컴퓨터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개념은 뇌세포가 스스로 만들어 낸 망상일 것이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눈알을 파내어 아무리 현미경으로 봐도 경치나 건물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보였던 모든 것이 꿈이라고 해야할지는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두뇌를 꺼내어 아무리 뒤져도 ‘정의와 자비’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머리 위 어딘가에 그 개념들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이는 세계만을 믿는다면 나는 도저히 ㅇㅅㅇ나 ㅌㄹㅍ같은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자비의 태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electron)라는 놈은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까불다가(?) 사람이 관찰을 하는 순간 ‘입자’로서 질서있게 움직이듯, 이 우주의 모든 것도 전지적 관찰자가 있기 때문에 질서와 정의가 유지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전지적 관찰자의 관찰이 없다면 모든 존재는 혼돈에 묻힐 것이다. 관찰이 되고 있다면 모든 것에는 존재이유가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보이지 않는 세계도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이런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을 자비롭게 바라보는 태도를 지니고 싶다. (이것은 혹시 독자의 관찰을 의식한 발언은 아닐까?)

이 부부는 굳이 주위에 보이지 않는 전류가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쉽다. 물질세계에 속한 내 머리의 기억세포를 동원하여 이번 주에 만날 그 얼굴들을 떠올리니 절로 내 얼굴 미세근육이 입꼬리 끝에서 꿈틀거리고 심장의 온도가 높아진다. 이 과정에 그냥 물질법칙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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