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냄새를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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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아래 아슬하게 붙어있는 노란 잎사귀들 사이로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숲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걸으면 바삭한 소리와 함께 어느 식상한 시구가 추억처럼 떠오르고 코끝에 스치는 마른 냄새는 이미 땅의 비옥함에 섞여간다. 대도시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할 이 늦가을의 감각들이 싫지 않다.

문득 생각이 난 지인이 있어 오래간만에 커피를 사들고 집을 찾았다. 얘기 도중에 어쩌다가 요즘 나의 고민을 살짝 꺼냈었다. 내 속에는 경쟁을 하는 두 가지 마음의 흐름이 있다. 토양으로 치면 좁은 밭에서 두 종류의 나무가 함께 자라는 것이다. 하나는 가꿀수록 잎과 꽃이 당장 보기 좋고 주위의 시선을 끌기도 해서 은근 흐뭇하기도 하지만 뿌리가 얕고 열매가 돌배처럼 쓸모 없다. 다른 하나는 생김새가 볼품이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자랄수록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는 쉴만한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며 열매가 훌륭하고 나무는 집을 짓는 자재로도 쓰여 그 쓸모들이 흡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두 종류 중 한가지 수종만 기르기도 하고 혹여 둘 다 기르더라도 어느 하나에 더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두 수종을 같이 돌보는데 둘 다 괜찮게 자랄 때는 고민이 생긴다. 이성적으로는 아무래도 두번째 수종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수종은 가꾸면 가꿀수록 끝없이 자랄 것이고 그 보람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첫번째 수종에도 똑같이 몰입한다. 첫째 것은 내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고 두번째 수종은 어딘가에서 들여온 것이다.

지인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 사진에 취미가 있어서 시간이 나면 동해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전년도에 절벽 근처 돌밭에 어렵사리 자라던 소나무는 그닥 자라지는 않았지만 죽지않고 기어코 그 자리에 계속 살아있는데, 막상 토양이 좋은 소나무 숲에서 막 자라기 시작한 나무들은 이듬해에 다시 가보면 큰 나무들에 치여서 대부분 시들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토양이 기름지더라도 경쟁이 있는 곳에는 다같이 잘 자랄수는 없는가보다 하였다. 하물며 그곳에 다른 수종이 끼어들면 성장할 여지는 더 없을 것이다. 내가 맡아 키워야 할 귀한 수종이 어렵사리 그 토양에 심겨졌다면 기존의 소나무들은 어쩌면 그냥 베어버려야할 가시같은 존재들일 수도 있겠다.

내 경우에는 그 베어버려야 할 나무들의 화려함에 자주 혼이 빼았긴다. 그 바람에 자꾸 정성과 시간을 들이게 되고 또 그 가꾼 결과를 감상하며 흐뭇해한다. 나의 시간은 한정이 되어있고 똑 같은 시간에 (멀리서 들여온) 다른 수종을 돌보면 그 보람을 적게는 삼십배, 보통 육십배, 많게는 백배까지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있어왔던 수종을 즐기며 정신을 빼앗긴다. 가끔 죄의식마저 느낄 지경이다. 지인은 나의 이런 고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만약 아버지에게서 그런 관심과 재능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다면 그 아버지는 자녀가 휴일에 밖에서 그 재능을 맘껏 발휘하며 친구들과 신나게 논다고 해서, 그 시간에 자기와 함께 등산이나 낚시 가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할까요?’

아마 나는 젊었을 때 읽었던 책의 어느 부분이 너무 인상깊었는지도 모르겠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들이 진지하게 몰입하는 대부분의 활동들이 사실은 ‘심심풀이(diversion)’에 불과할 수 있다고 했다. 방구석에 조용히 앉아 자기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는 것은 너무도 싫고 부담스러운 일이라, 밖으로 나가서 뭔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몰입할 활동을 늘 찾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몰입하는 몇몇 활동들도 사실 뭔가 긴요한 것을 회피하는 식이라면 죄의식을 가질 법도 할 것이다. ‘죄’라는 것의 어원도 ‘과녁을 벗어난 것에 한눈을 파는 것’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안의 두 수종을 바라보는 시각은 흑백논리와 비슷한, 결벽에 가까운 관점일수도 있다. 이런 나의 고민에 그는 어떤 조화와 관용의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YOLO를 외치는 세상에서 너무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밭은 작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당장 즐기고 있는 것들은 아무리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더라도 다른 집으로 이사할 때는 결국 버리고 가야하는, 일종의 ‘어른 장난감들’이라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직도 나의 고민은 떨떠름하게 남아있는 셈이다. 삶은 늘 죽음을 품고 있다. 가을 빛을 머금은 단풍이 아무리 아름답고 떨어진 낙엽을 밝을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아무리 즐거워도 결국 나무는 모든 것을 땅으로 흘려보내고 겨울을 맞아야 할 운명인 것이다.

어떤 호로자식이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미리 유산을 요구해서 챙기고 이민을 갔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부자의 인연을 끊고 다시는 보지말자는 의미였다. 낯선 땅에서 욕정으로 재산을 모두 날리고 정착하지도 못한 채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에는 고향을 다시 찾았다. 굶주림이 모멸감을 이긴 것이다. 아버지에게 잘못을 빌고는 하인으로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놀랍게도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면서 끌어안고 키스한 후 잔치까지 벌였다. 상속재산은 날렸지만 관계를 되찾았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에게서 어쩌다가 물려받은 관심과 재능을 모두 날려버리는 과정을 겪어야만, 이 잔치가 모두 끝나야만 결국 낙엽을 거름삼아 하늘에 닿는 더 큰 나무로 자라게 될까? 세상은 ‘관계’에 대한 거대한 교육 과정이라고도 한다. 내가 물려 받은 재산으로 내 시간을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만 뭔가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누면 작아지는 것이 있고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이 있다. 재산을 나누면 줄어들지만 관계를 나누면 더 늘어난다. 물질적인 세상이 귀하게 생각하는 대부분은 나누면 줄어드는 것들이다. 그러나 관계를 비롯하여 신뢰, 희망, 사랑, 자비, 지식 등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 아버지에게 충실했던 큰 형이 그 호로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화를 낸 것은 방탕하게 써버린 재산의 관점으로만 아버지와 동생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정의에 자비가 없으면 늘 일어나는 가혹한 마음이다.

나도 불의한 재산을 미리 땡겨서 물려받았다. 그 재산은 여러 나무가 자라는 내 작은 밭, 바로 내 ‘존재’이다. 그 재산을 나는 지상에서 관상용 나무를 위해 탕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면 언젠가 사막이 된 밭 위에서 헐벗고 굶주린 다음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이왕이면 누군가 고맙게도 마련해 준 이 밭에서 멀리서 귀하게 들여온 그 두번째 묘목을 가꾸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들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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