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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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10년 전 쯤이었을까? 어떤 사람에게 비참한 심정으로 토로했던 말이다. 제 3자 앞에서 뭔가 의도를 가지고 그를 헐뜯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당사자인 그 사람이 결국 알게 되었다. 들키지 않았으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들켰고 나는 스스로의 말과 행위가 치졸하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평소 그 사람의 위선과 술수를 내내 경멸해왔던 터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인성과 상관없이 나의 행위는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모멸감 때문에 괴로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 들킨 것이 나의 영혼을 위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과를 했지만 그는 실제로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 뒤로 나는 그의 소식을 모른다. 당시 나이로 볼 때 지금쯤은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용서를 자주 이야기한다. 배우자, 자녀, 친구에 대한 작은 용서에부터 시작해서 이웃에 대한 좀 더 난이도가 높은 용서에 이르기까지 용서는 관계를 유지시키고 내적인 평화를 누리기 위해 날마다 넘어야할 크고 작은 산이다. 고대 인류의 어느 스승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했다. 이것은 일흔여덟 번부터는 드디어 상대를 저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죽을 때까지 용서를 연습하라는 의미이지 싶다. 그러나, 나 자신에 관해서라면 용서를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 비록 예전의 그 일이 마음 어느 후미진 곳에 희미한 회한으로 남아있지만 이미 나는 그 때를 잊고 살아가고 있고 현재의 내 의식에도 그리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나는 연습도 필요없이 스스로를 이미 용서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용서는 이다지도 가볍다.

용서는 사랑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과제는 나에게 늘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나 미적분처럼 어렵기만 하다. 마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관 없이 처마 밑에 보기좋게 나무판에 새겨진 채 소시적에 걸려있던 ‘가화만사성’이라는 문구와 같다. 내 마음과 상관 없이 마음 귀퉁이 어딘가에 숙제로 달려있을 뿐이다. 그 ‘이웃’에는 내 ‘원수’나 ‘적’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요즘 시대의 트렌드로 말하자면 영화 주인공은 (반려견을 포함해서) 자신의 가족이 다쳤을 때 분노와 복수로 모든 관련자들을 다 죽여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우리는 그런 통쾌한 스타일에 열광하는 시대를 살고있다. 원수를 용서하라고? 설사 용서가 세상을 위해 좋다는 것을 평소 수긍하고 있었더라도 막상 나에게 용서할 사람이 생기면 문제가 달라진다. 내 아버지가 일본 순사에게 고문당했다면? 내 가족이 광주에서 군인에게 학살당했다면? 어느 강도가 내 식구를 죽였다면? 막상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용서를 하는 것이 오히려 죄악처럼 여겨질 지경이다.

나에게는 분명 적을 용서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기독교에서는 그런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을까? 정말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도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를 매일 왼다. 적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나 자신도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뉘앙스인데, 그렇다면 나 자신은 영영 용서받기란 글러버린 것 같다.

C.S. Lewis는 이런 상황에서 좀 쉽게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수학을 공부할 때 처음부터 미분적분을 풀려는 사람은 없고 시작은 늘 더하기 빼기부터 연습한다. 마찬가지로 용서하는 방법을 정말로 익히고 싶다면 일본 순사나 전두환 군부나 강도를 용서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배우자나 자식들, 혹은 친구들이 며칠 전에 나에게 했던 (혹은 해주지 않았던) 말이나 태도나 행동부터 시작하면 이것만 해도 당분간은 바쁠 것이다.

둘째,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자기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심리적인 병(나르시즘)에 걸렸거나, 영적인 병(교만)에 걸렸거나, 혹은 세상의 중심에 자기가 있고 모든 것은 자신의 중력에 의지하여 돌고있는 위성들이라는 지적인 병에 걸린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온갖 혐오스러운 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버리지 못한다. 자기애는 나에게 매력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그 이웃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감정은 노력한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그 이웃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라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좋은 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좋은 감정을 가져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누가 봐도 질이 나쁜 사람을 앞에 두고 ‘몰라서 그렇지 사실 알고보면 이 사람도 좋은 사람이야’하는 판단을 어떻게든 이끌어내야 하는 압박으로 느낀다. 사실, 스스로를 솔직하게 관찰할수록 사람은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들일수록 공통적으로 자신을 비천한 쓰레기에 가까운 사람으로 여긴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에게서 많게 혹은 적게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면을 보아도 그것은 혐오하지만 그 사람 자체는 버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능할 수 있다. 최소한 나 자신은 늘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나는 10년 전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떠올리면 참담하다. 그렇더라도 나는 결국 자기애를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공평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증오나 혐오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잔인하거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혐오하는 것은 오히려 의무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 자신이 내 안에 있는 것을 혐오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혐오해야 공평할 것이다. 즉, 행위는 유감스럽다, 그리고 처벌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 사람 자체는 무엇을 왜 그렇게 했건, 언제건 어디서건 어떻게든 치유를 받고 다시 사람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10년 전 일을 그렇게 용서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태도로 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라’라는 말은 ‘좋은 감정을 가져라’, ‘억지로 좋은 점을 발견해라’가 아니라 ‘잘 되기를 바라라’ 정도인지도 모른다. 자기자신은 사랑할 만한 점이 있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듯, 어쩌면 똑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도 버리지 말기를 공평한 신은 그렇게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고차방정식을 나의 현실에서도 잘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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