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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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머리 새로했냐는 말을 들었어.” 그냥 기른 것 뿐인데 사람들이 미장원에서 새로 한 줄 알고 물어오더라는 것이다. “다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하며 아내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때 나는 그냥 “그래?” 하고 말든가, 아니면 “당신이 겨울지난 봄꽃처럼 예쁘고 반가워서 그랬겠지.”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대신 나는 “사람들은 인사치레로 그렇게 말하기도 해. 너무 그런 칭찬에 일희일비하지 말기 바래.” 하고 말았다.

여기 캐나다 서양 땅에서는 “어떻게 지내요?(How are you?)”하고 누가 물어오면 “잘 지내요. (I’m fine)”하고 무조건 대답해주어야 한다. 팔 길이(arm’s length)보다 더 떨어진 관계에서는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질문을 정직하게 듣고 최근에 있었던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사건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서로 어색해져 버리기 십상이다. 아무리 자녀문제 때문에 우울하건, 부부관계가 나빠져서 스트레스가 많건,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건, 왠지 그냥 외로움을 타고 있건 간에 그 질문의 답은 항상 “I’m fine.”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상사로부터 “Can you do this?”라는 말을 들을 때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내 능력을 묻는 줄 알고 너무 순진하게 “No I can’t.”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낭패다. 이 말은 일단 ‘지시’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 못하겠으면 그 이유를 보스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그래도 안되면 지시받은 것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도 언어 때문에 이런 미묘한 혼란이 생기지만, 같은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도 남녀간에 대화할 때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의 모드를 좀 달리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 무심코 아저씨들끼리 하던 말투나 사고흐름을 따라가다가는 산불처럼 금방 말다툼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아내에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 “How are you?” 정도의 인사말일 수도 있으니 그 의견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도였던 내 말은 어쩌면 아내의 정신건강을 위한 조언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은 좀 할인해서 듣는 편이 낫지 않을까?’하는 정도로. 그렇지만 아내는 “왜 당신은 사람들의 말이 진심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삐딱하게 봐?”하며 응수했다.

남녀의 대화에는 좋게 시작했다가도 갈림길에 맞닥뜨리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동조를 하거나 격려나 위로를 해주는 대신에 상대방 기분을 살피지 않고 너무 정직한 의견이나 진지한 조언이나 유익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말을 건네다가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 강 너머에는 상처입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에게 무질서한 화살을 쏘아대는 전쟁터만 있다.

언젠가 어떤 드라마에서 친구들끼리 교정에 둘러앉아 한 여학생이 남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여자가 이사를 했어. 근데 새 집이야. 문을 닫으면 페인트 냄새가 심해서 머리가 아픈데, 그렇다고 문을 열자니 매연이 들어와서 기침이 나. 이 때 남자 친구가 왔어. 여자가 물어. ‘자기야, 오늘 이사했는데 문을 닫으면 페인트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문을 열면 매연 때문에 힘든데 어떡하지? 문을 여는게 좋을까 닫는게 좋을까?’ 이때 남자 친구의 올바른 대답은?” …옆에 있던 남학생들은 “그래도 매연이 페인트보다 낫지 않을까?”, “아니지 문 닫고 페인트 냄새를 맡는게 차라리 낫지.”하며 갑론을박 했다. 그러나 이를 한심한 듯 바라보던 여학생은 남학생들에게 “둘 다 아냐. 정답은 ‘너 괜찮아? 병원가야되는 것 아냐?’하는 거야.” 황당한 남학생들의 반응은 “지랄을 한다. 지가 문을 열것인가 닫을 것인가 물어놓고는…”였다.

뉴튼도 니체도 아인슈타인도 프로이트도 여자의 마음은 헤아리기 힘든 신비라고 했다. ‘신비’라는 말은 해석이나 납득이 당장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내 앞에서 막강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신비나 버뮤다 삼각지의 신비와 다르다. 같은 미스테리지만 그 같은 신비는 나의 실존적인 삶과는 사실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신비는 다르다. 그 무게감은 피라미드나 버뮤다의 신비와 비할 바가 못된다. 무시하고 피하고 싶어도 그 존재감은 바위처럼 내 앞에 있다. 때로는 그 사고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갈등으로 점화되고 후속적인 감정적 소모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지어 우정조차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커다란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했다. 몸은 다르지만 가치관이 같고 바라보는 곳이 같아서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된다. 그러나 남녀는 하나의 몸에 깃든 두 영혼인 것 같다. 사고의 흐름이 다르고 생활에서 우선시하는 것도 다르며 속에 품은 뜻도 다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몸이다. 몸에 다른 한쪽의 영혼 없이도 겉으로는 문제없이 몸을 움직이며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다른 부품으로서 함께 완성체가 되어야만 여행길에서 도달할 수 있는 곳도 있어보인다.

이해하라고 있는 신비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신비 앞에서 늘 헤맨다. 그렇다고 내 삶에서 발휘되는 그 중력과도 같은 존재감을 무시할 수도 없다. 중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때는 십자가처럼 어깨에 어쩔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내가 닿지 못하는 높은 곳에 달린 귀한 열매를 떨어뜨려주기도 한다. ‘신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mysterion’이고 라틴어로는 ‘sacramentum’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성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내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행위와 결합되어 나에게 효력을 나타내고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들었다.

여성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신비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 달린 팔을 내가 잘라낼 수 없듯이 내 앞의 여성도 무시할 길이 없다면, 어떻게든 대화 중에 다가오는 갈라지는 지점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서라도 이 여성을 통해서 오는 그 효력을 선한 방향으로 담아내도록 애써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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