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725

우리 집 잔디에는 주위 이웃집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잡초가 몇 해 동안 여러 군데에서 듬성듬성 방치되고 있었다. Dallis-weed라는 놈들인데 줄기가 강인하여 제초제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뿌리가 잔디와 하도 튼튼하게 엉켜있어서 한번 손을 댈라치면 그 주위 건강한 잔디까지 몽땅 파내야만 한다. 민들레는 댈 것도 아니다. 흉한 땜빵 생기는 것이 마음 아파서 전전긍긍하다가 다년생인 이놈들이 해가 갈수록 점점 세력이 넓어지는 것을 보고는 옆집 창피해서 할 수 없이 팔을 걷어 부쳤다.

잡초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벼 밭에 잡초가 많은데 가서 뽑아버릴까요’ 하고 묻는 장면이 있다. 예수는 ‘아서라, 벼까지 같이 뽑혀 소출이 적어지면 어떡하니. 같이 자라게 두었다가 타작할 때 솎아서 태워버리면 된다.’ 하고 말한다. 나로서는 사람을 두고 벼일까 잡초일까를 식별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내 격에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내 마음 속에는 분명 벼 모양의 것과 잡초 모양의 것이 구별이 된다. 잡초 중에서도 우리 집 잔디밭에 자라는 저 질긴 잡초, 파 내려면 주위 잔디까지 몽땅 같이 파낼 수 밖에 없는 뿌리 깊은 잡초들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만(pride), 허영(vanity), 감각적 탐닉(sensuality)이라는 세가지 근원적인 잡초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셋 중에서 다른 둘보다 유난히 돋보이는 하나가 있다. 어쩌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엉겨있는 실존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잡초와 달리 파내 버리기란 애초에 불가능할 수도 있다. 뭔가 원죄 같기도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오랜 동안 품고 살며 전전긍긍 해왔고 늘 이 때문에 궁지에 몰리지만 달리 쉽게 어쩌지도 못한다.

아내와 얘기하던 중에 나는 아무래도 sensualist에 해당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셋 모두가 나에게 똑같이 있는 것 같아서 어느 쪽으로 기우는 지 분간을 못하다가 아내에게 각각의 특성을 설명해 주니 금방 골라주었다. 나의 오랜 관찰자였으니 아내 판단이 맞을 것이다. 감각적 탐닉에 해당하는 사람은 쾌락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의 안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게으른 경향이 있다. 귀찮은 일을 멀리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일이 생기면 그것이 중요하거나 꼭 필요한 일이라도 화를 잘 내며 웬만하면 어떻게든 끝까지 미루려고 한다. 간혹 바쁘고 열심히 일하는데 그것은 오직 그 일 이후에 더 편안해지기 위해서이다. 감각적 즐거움을 좋아해서 식탐이 있는 경향이 있고 영화 보며 밥을 새우는 때도 있고 19금도 좋아하고(부끄) 등등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자질구레한 일을 부탁할 때면 ‘내가 하고 싶을 때 할께’ 하고 그 자리에서 들어주지 않고 버틸 때가 많은데, 지금까지 나는 내면의 자유감을 손상시키는 것이 싫어서라고 고상하게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다른 불순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고문이 무서워서 사육신이나 순교자는 ‘죽어도’ 못되었을 것이다. 살을 좀 지지는 것 까지야 그렇다 하더라도 무릎 관절을 부수고 뼈를 부러뜨리는 상상을 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성경 시편에는 ‘그의 뼈들을 모두 지켜 주시니 그 가운데 하나도 부러지지 않으리라’ 라는 내용이 있고 ‘주는 나를 엄하게 다루셨어도 죽음에 부치지는 않으셨도다’ 라는 말도 나온다. 소심한 sensualist로서 단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아무리 삶이 내 살을 지지고 찢더라도 뼈만은 상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리 생각하니 지난 과거에 겪었던 일들은 겨우 찰과상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고 아직 뼈가 상한 일은 커녕 살 찢기는 일조차 겪지 않은 것 같아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왜 유독 우리 집에만 저 잡초가 무성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다른 집들과 다르게 애써 외면하고 방치한 탓일 게다. 추수할 것도 아닌 바에야 나는 기다리지 않고 주위 잔디와 함께 모조리 뽑아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상당한 상처가 수없이 생겼다. 더운 여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거름냄새 나는 흙을 사다가 군데군데 덮었다. 마음 깊은 데에서 뭔가를 뽑아버린 듯이 가볍다. 오월은 대지에 생명이 약동하는 때이다. 아직 건강한 이웃 잔디들의 도움으로 군데군데 상처가 잘 아물기를 기대해 본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