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잠깐 방심했다가 딱딱한 껍질로 철통같이 지키던 속살에 모래알이 하나 들어온다. 연하디 연한 속살에 자꾸 닿으니 하염없이 고통스럽다. 조개는 입을 벌려 어떻게든 모래알을 내보내려 해보지만 부질없다. 손가락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도무지 꺼낼 방법이 없으니 작은 모래알은 바위덩이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작은 돌멩이를 몸에서 나오는 액으로 감싸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는 것 뿐이다. 눈물처럼 감싸고 감싸다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뜻하지 않게도 조개는 그것이 진주로 변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록도를 ‘조개의 눈물’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하찮은 미물의 눈물조차 값비싼 보석으로 변한다면 사람의 눈물은 얼마나 더 귀한 보석으로 변할까? 정말 이런 반전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구절이 정녕 참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울고있는 것이 ‘지금 당장’이라는 것이고 과연 ‘언제 쯤에야’ 웃게 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한센병은 오랫동안 유전병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족 중에 누가 그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마을을 무조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소문이 나면 우물조차 사용할 수 없으니 생활을 이어갈 방법이 없다. 걸핏하면 이사하며 환자를 숨겨야 했다. 얀센병 아이가 있는 집의 자녀들은 남들이 알게 되는 날부터 평생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가 자라서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까지 숨기다가 결국 아이의 호적을 파서 소록도로 보내게 된다. 소록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본적이 모두 소록도라고 한다. 섬에는 5살 무렵부터 들어온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아이는 설사 병이 낫게 되더라도 다시 가족에게 갈 수 없다. 병이 아무리 나았다고 한들 가족을 찾았다가는 가족 모두의 앞날을 다시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여의도의 1.5배 정도 되는 소록도에는 환자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환자지역에 있는 소나무들은 해안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소나무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고 현지 사람들은 전한다. 목을 매달지 않았던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집에는 하나같이 거울이 없고 사진도 없기 때문에 장례식장에는 영정사진조차 없기 일쑤이다. 무슨 삶이 이럴까?
고향 진주 근처에서도 산청으로 가는 국도 곁 지리산 자락에 강을 사이에 두고 외로운 다리 하나를 가로질러 한센인들이 모여사는 시설이 있었다. 버스로 거기를 지날 때마다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마치 무서운 외계인들이라도 모여 있는 곳 같았다. 내 또래 모든 아이들의 상상도 이와 비슷했다.
고향을 떠난 이후에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지켜볼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 그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어쩌다 듣고 알게되었다. 나에게는 아무리 창고같은 지난 날의 기억들을 뒤져봐도 그정도로 절망스러웠던 때는 찾을 수가 없다. 설령 아무리 괴로웠던 일이 있었다 한들 이들의 삶에 비하면 그저 맑은 오월 봄날에 볼을 스치는 잔바람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 한 구석에 소록도와 같은 곳이 있어왔는데도 같은 하늘 아래 나는 이렇게 무탈해도 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마음조차 미안하다.
극심하지는 않다하더라도 누구나 살다가 여러 종류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그것으로 끝이고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는 것이라면 이보다 재수없는 일이 있을까? 우리는 삶에서 이렇게 운수 없는 일들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도 운동하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다면 그 괴로움이라도 잊기 위해 열심히 마음을 공부한다. 때로는 고통을 요리조리 피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우리가 보통으로 할 수 있는 대학 과정이라면, 고통과 괴로움에 임하는 자세에도 ‘석박사’ 과정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과정을 수료한 적이 없다. 다만 눈물이 진주로 변하는 고급 과정이라고만 들었다.
나뭇꾼에게 도끼는 자신과 함께 식구들의 생명까지도 책임지는 소중한 도구이다. 그것을 잃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만약 그 과정에서 은도끼와 금도끼를 얻게 된다면 그 고통은 분명 시간차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시간차이다. 이 시간차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눈 앞의 고통이 결국 축복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얼핏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삶을 계속 붙들게 해주는 생명과도 같은 도끼를 잃어버리고 망연자실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건강이었을 것이고, 사람에 따라 그것은 명예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면전에서 ‘언젠가는 (이 세상이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반드시) 웃게 될 것이요’ 하고 위로해주기란 참 민망한 일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도끼를 잃어버린 다음 결국 소나무로 향해 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앞선 인생에서 도끼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금도끼와 은도끼를 차지할 일도 아예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는 밭을 갈다가 돌덩이들을 보고는 몹쓸 밭으로 치부하고 그 밭을 싼 값에 팔아버린다. 그러나 다른 이는 똑같은 돌을 보고 그것을 보석으로 알아보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두사람이 본 것은 동일한 것이었다. 어쩌면 고통이라는 것도 내가 의미를 발견하기에 따라 보석으로 변하는 반전을 가져다 주는, 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내 삶이 언젠가 소록도로 변할지라도 예전처럼 무서워하지 않고 이제 그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기를 조용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