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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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향 주소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이고 동네이름은 ‘새마을’ 부락이었어요.”

아내가 처음 내 주소를 듣게 되었을 때 무척 재미있어 했다. “보석 같은 영재들이 새로 모여 살았나요?” 하며. 그 아름다운 이름의 고향에서 어린 시절 나는 사실 좀 떨어지는 아이였다 . 당시 동네 길을 걸으면서 나는 똥꼬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창피하지 않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베르그송에 의하면 사람이 무엇을 인지할 때는 당장의 맨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쌓인 경험과 기억의 눈으로 눈앞의 현재를 인식한다. 그런데 아기들의 경우에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냄새가 ‘역하다’라는 관념이 쌓이기 전에 어린 시절 최초로 맡는 똥꼬 냄새는 역겨운 대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신기한’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솔직히 좀 창피하다. 그래서 굳이 철학자 이름을 갖다 대었다. 아내가 이 글을 본다면 ‘그래서 어른인 지금도 양말 벗을 때 냄새를 맡아보셔? 신기해서?’ 하겠지….)

문제는 그 신기한 냄새에 몰두하는 사이에 담벼락 아래 삼삼오오 햇볕은 쬐고 있던 동네 형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낄낄거리던 형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들 앞에서 대 놓고 당하는 수치는 자고로 오래 남는 법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을 때도 그랬다. 시골 초등학교이고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어서 엉뚱한 녀석이 전교 학생회장에 뽑히는 이변이 가끔 있었다. 친구 임원들, 특히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한 몫 했다. 어릴 때는 눈이 사슴 같았으니까(죄송). 그러나 아침 조례 때마다 나는 공포에 싸였다. 모든 구령을 맨 앞에서 정확한 순서대로 해야 했지만 한 번도 구령을 안 틀린 적이 없다. 훈화하려고 단상에 선 교장선생님한테 전교생 앞에서 혼이 났다. 결국 유사이래 없었던 퇴출을 당하고 2학기 때에는 사는 곳이 ‘명석’면도 아니고 ‘우수’리도 아닌 아이가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고등학교 때에도 그리 우수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농촌에서 자랐지만 농사일을 거의 알지 못하는 나에게 한번은 아버지께서 톱질을 시키셨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농사일을 간간히 도왔었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가장 심한 농번기 때 조차도 나만은 자주 열외였다. 아무리 농사일이 고단해도 한참 공부하는 녀석에게 학교를 하루 쉬고 집안 일을 도우라고 하기에는 미안들 하셨을 것이다. 일머리가 없었다. 톱질을 하다가 그만 톱으로 오른쪽 무릎을 찍었다. 피가 줄줄 흘렀다. 뭐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걱정하며 달려오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야단을 맞았을 때는 서러웠다.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보기까지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야 했다.

피부 살성이 좋지 않은데다가 적절한 치료도 변변치 못해서 그 때 상처는 흉터로 오랫동안 남았다. 모양이 마치 북두칠성 같았다. 그런 모멸의 기억 때문일까? 어느 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유난히 욱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실 어떤 일이 완성되려면 다른 사람에게서 피드백을 받거나 조언을 듣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쓰다 하더라도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은 남들로부터의 피드백을 스스로 기피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항상 넘어진다. 피드백이나 조언이나 간단한 질문 조차도 늘 자기를 향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최근에 어떤 독자로부터 홈페이지 건강섹션의 ‘어떤 기사가 저작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하는 코멘트를 받은 적이 있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지적임에도 그것을 공격으로 느끼며 서운해 했다. 그 독자와 몇 번의 서신 교환을 하는 와중에 문득 변명과 정당화를 계속 시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흠칫하였는데,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며칠 우울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어린 시절 똥꼬 냄새를 맡듯이 맨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며칠 전에 ‘소쿠리’의 비유에 착안한 글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때 묻고 더러워진 소쿠리로 몇백 미터 밖 시냇가의 물을 담아 집에 있는 항아리에 채우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오랫동안 시도하다 포기했지만 제자는 결국 자기 소쿠리가 깨끗해진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스승의 초점은 채워야 할 항아리가 아니라 소쿠리였던 것이다. 내 마음은 때가 많은 소쿠리처럼 콤플렉스로 가득하다. 좋은 것을 담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기억나는 모든 때와 먼지를 마음에서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득 무릎에 있던 북두칠성을 살펴보니 지금은 많이 희미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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