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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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무렵에 하루는 도서관 벽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자보가 붙었다. 제목에 001이 있을 때도 있고 좀 지나서는 002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숫자는 당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정도(%)라는 글쓴이의 생각이라고 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느 정도로 관대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중매체에서는 대담하게 커밍아웃하는 사람도 있고 일반 사람들도 예전처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회적 성공이 가장 부러운 세상에서는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 정도로 치부하는 모양이다. 하긴, 돈을 잘 벌게 해줄 것 같은 사람이면 범죄 경력마저 의심되더라도 대통령으로 뽑는 세상이긴 하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이미 성적 취향은 헌법이 정하는 인권보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공공연하게 차별적인 언행을 드러낸다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당사자에게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공직에 당당하게 출마할 수도 있으며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는 합법적인 혼인을 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도 어릴 때부터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해서 존중해 주는 태도를 교육받는다. 여권 등 공식적인 서류나 신분증에는 ‘성’을 표시하는 난에 남자(M)나 여자(F) 대신 ‘X’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성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트랜스젠더, 스스로 양성(two-spirit)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남녀 이분법적인 분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non-binary)을 위한 정부의 배려가 들어있다. 자신의 성(gender) 정체성을 서류적으로 자유롭게 변경하는 신고절차도 마련해 두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서양의 제도를 따라가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다. 국회의원들은 ‘건강가정 기본법’이나 ‘차별금지법’ 등의 법안을 상정하고 있는데, 얼핏 자유와 인권을 좀더 보호하려는 고상한 취지의 법안들이라는 인상과 함께 막연한 호감을 일으키지만 사실 여기에는 성에 대한 정체성 부분에 ‘남성, 여성 및 그 밖에 알려지지 않은 성’이라는 문구가 들어감으로써 전통적인 남녀 외에 다양한 성 정체성을 법적으로 허용하려는 시도 역시 내포되어 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이 법적 지위를 얻게 되면 동성혼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지고 자유와 인권의 이름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법이 부지불식간에 상정되어 통과된다면 머지않아 대학 도서관의 벽에는 999라는 숫자가 포함된 대자보가 붙을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자유와 인권의 문제라면 가정에서 부모가 어린이를 대하는 것도 더 이상 집안 내부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하여 아동을 보호하게 되듯이, 성적인 취향 역시 인권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과 함께 다수결의 원리가 작용하여 공익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이념을 통해 법률화 되는 것이다. 신이 정한 윤리가 있거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룰이 없는 사회는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와 상대주의적 사고가 기준이 되기 마련이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고 타인의 취미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최선의 질서일 것이다. 성인들끼리 서로 합의 하에 사적으로 벌이는 일에 대해 무엇을 왈가왈부할 것인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 car named ‘Desire’)’라는 연극이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요즘의 시대흐름을 보면 국가가 나서서 사람들이 가진 욕망이라는 전차를 위해 거리 곳곳에 공식적으로 전차길를 건설하고 전기선을 설치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전차길을 벗어나 사고만 내지 않는다면, 전차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마음껏 자유롭게 누빌 수 있게 도와준다. 욕망이 춤판을 벌일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줄수록 사회는 번영하니 풍요로울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미 자본주의가 닦아놓은 소유욕의 전차길 외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성에 대한 욕망에도 2호선을 깔아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극단적 성공을 목격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편리함을 누리게 되면서부터 ‘사람의 자유’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게 된 것 같다. 자유는 늘 어떤 경계나 틀 안에서의 자유일 수밖에 없는데도 항상 일탈을 꿈꾸게 되는 것은 만족을 모르고 꿈틀거리는 내 안의 무한한 욕망 때문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 경계를 주는 것은 수문장처럼 늘 지키고 있었던 ‘자연(nature)’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인간은 과학기술로 너무 기고만장하여 자연을 주무르기까지 하다 보니 아예 욕망은 자연을 만만하게 보게 되었고 ‘자연’을 스스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으로 다수결이 합의한 인위적 경계 외에는 자연적으로 세워진 경계는 본질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우리는 결국 문명의 달콤함과 함께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혼의 당뇨병을 얻고 말았다. 산업혁명은 자기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지구에 환경적 재앙을 가져온다. 성의 혁명 역시 어떤 경계를 지키지 않는 순간 또다른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다만, 그런 재앙은 환경처럼 몇세기가 지나서야 모두가 그 결과를 느끼게 될 뿐이다.

피임기술 역시 성과 생명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끊어놓았다. 아기가 생길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면 성은 오락으로 변질되기 쉽고, 혼전에도 혼외에도 영혼의 교감이 있건 없건 즐기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제 성은 ‘관계’라기보다는 ‘활동’에 가깝다. 취미활동이 다양한 것처럼 성의 취향도 다양한 것이 뭐가 문제인가? 이러한 관점은 부부관계로도 역류하여 부부의 성마저도 아기의 공포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인적 쾌락을 동시간에 즐기는 활동’ 정도로 전락하기 쉽다. 성과 생명이 상관없어지는 순간, 성은 이제 맛있는 요리를 즐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이 되어버린다.

성이 음식을 같이 먹는 정도의 행위이고 사랑이라는 것이 그 즐기는 맛이라면, 맛있는 음식을 결혼 전에 먹건 결혼 후에 먹건 모르는 사람이랑 먹건 남자와 먹건 여자와 먹건 짐승과 먹건 무슨 상관일까?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기르던 돌고래를 너무도 사랑(?)해서 돌고래와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피임기술은 욕망이라는 전차가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향하도록 은하철도 999를 깔아준 것이 아닌가 싶다.

자유의 경계는 늘 ‘자연(nature)’이다. 사람의 자유는 ‘인성(human nature)’이라는 한계 안에서의 자유이다. 인성이 자연스러움을 벗어날 때 그것은 일탈이 된다. 그 인성 안에는 ‘생명의 추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생명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성은 결국 본질적으로 자위행위와 다를 바 없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결국 부부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가정의 결속력이 떨어지며 나아가 각자 이기적인 구성원이 넘치는 사회가 되는 근본 원인이 될 것이며 이런 이기적인 사회는 늘 짜증과 충돌로 넘치게 될 것이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술로 흥청망청 밤새 마신 사람은 아침에 머리가 깨지지만, 허기진 채로 잠을 잔 사람은 개운하고 맑은 정신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밤새 어두운 도시 골목골목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미친듯이 누비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른다. 되돌릴 길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 내가 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내 마음 안에 (내가 은밀하게 동의했기 때문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전차길에 지금이라도 ‘여기부터는 접근금지’라는 팻말을 조금씩 박아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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