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작은 연못에 황소개구리 한마리가 놀고 있다. 처음에는 성가신 모기와 날파리 같은 귀찮은 것들을 없애줘서 기뻤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놈은 연못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평화롭게 놀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삼키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용하고 소박했던 시골 연못은 생태계가 점점 파괴되고 물은 녹조로 변했으며 이제 황소개구리 한 놈만 신나게 헤엄치며 놀고 있다. 결국 저 놈은 블랙홀처럼 앞으로도 주위 모든 것을 계속 빨아먹을 것이고 내가 쫒아내지 않는 한 이 놈은 다른 연못으로 떠날 것 같지 않다. 언듯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연못들에도 이런 놈이 이미 차지하고들 있다. 그곳에서는 금두꺼비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조용히 다른 생물들과 연못 한 켠에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며 올챙이로 들여왔다. 저렇게 온통 연못을 휘저어 놓고 통째로 독차지할 정도로 자랄 종자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위험이 없지 않다는 생각을 조금은 했었지만 충분히 이 놈을 단속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은 성장해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그 올챙이가 지루한 연못 생태계에 균형을 잡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사람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한 번 유혹에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아예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일을 아무리 겪어도 나는 참으로 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나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르겠지’ 하고 되지도 않을 일을 계속 반복해서 시도한다고 한다. 도박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이 놈도 어찌저찌 정리되리라는 것을 믿고는 있다. 30대 회사원이었을 때는 가정을 팽개치고 친구들과 밤새 게임 중독에 빠진 적도 있고,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참담한 적도 있지만 그것들로 인한 풍파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극복해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잘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손절과 절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취미와 중독의 경계가 어디인지, 위로와 유혹의 경계가 어디인지 잘 모른다. 다만 다른 종류의 보물을 이미 품고 있던 사람에게 저 놈이 주는 위로는 자칫 ‘양다리’가 되기 십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마음안에 가치있는 모든 것을 밀어내버리고 안방을 독차지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양다리’가 더 나쁜 처지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망가져 넘어졌다면 자기가 넘어졌다는 것을 자각하기라도 하고 다시 일어나고 싶은 갱생의 희망이라도 가질 것이다. 양다리를 걸친 사람은 골다공증에 걸린 허약한 다리로 평생 골골하게 서있는데도 자신은 넘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일어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완고함이 있다. 혹시 모를 보험을 한다리에 걸쳤으니 나머지 모든 에너지는 황소개구리가 마음껏 뛰놀게 하는 데에 쏟아붓는다.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확신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로 어리둥절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굳이 알콜, 게임, 성, 도박, 마약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어떤 취미나 위로는 쉽게 중독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중독이라는 강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나쁘게는 ‘집착’ ‘강박’ ‘편집증’이라고 표현하고 좋게는 ‘취미’ ‘매니아’ ‘오타쿠’ 등으로 완곡하게 말할 뿐이다. 마음이 허한 시대이니 세상이 주는 위로에 대한 광적인 애착심마저 너그럽게 허용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영원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내 마음에서 1번이 되었을 경우에는 아무래도 그 외 다른 것들은 그것을 살찌우기 위한 먹이감으로서의 의미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놈을 살찌우는 데에 상관이 없는 풀이나 생물들은 결국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말라버리거나 멸종하고 만다. 영원한 것이 1번이 되지 않으면 ‘아침에 피었다가 점심에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것’을 위해 ‘아침에 피었다가 점심에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것들’을 쏟아 붇는 삶이 이어진다. 아마도 지금 현재 나의 생활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영원’이라는 것은 단순히 끝없이 이어지는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루함의 극치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지된 시간에 영원히 박제되는 모습도 아닐 것이다. 인간을 사랑한 창조주가 있어서 인간에게 불멸하는 영혼을 살도록 디자인했다면 이런 모습으로 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아주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말과 ‘인간성’이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포함된다. 시간은 우리 의식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시간은 마치 죽는 사람이 죽기 직전 자신의 생애 전체가 빛처럼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영원과 순간이 만난다. 생애를 완전히 시간적 순서로, 그렇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라본다. 마치 잘 알고있는 어떤 이야기를 회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의 생애를 다룬 전기를 읽고 난 다음 내용을 회상할 때 인물의 어린 시절부터 죽기까지의 모든 삶을 떠올린다. 순서가 있으되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모두 읽었다면 이제 나는 그 이야기 밖에 존재한다. 내 현재의 삶이 끝난다면 지금 생애의 밖에서 아마도 나는 내 삶의 전기를 한 꺼번에 바라보는 순간의 시간을 연장하여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단순이 물리적으로 이어지는 시간도 아니고 박제된 시간도 아닌, 영원한 삶에서 우리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 이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상상해본다. ‘양적인’ 현생의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영원의 시간 안에서 이 황소개구리는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CS Lewis는 “물고기는 자신이 젖는다고 바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젖는다고 불평하는 물고기가 있다면, 그 불만 자체는 그 물고기가 바다 생물로만 존재할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물고기에게 물이 자연스럽듯이 인간에게 물리적 시간이라는 제약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도대체 인간이 시간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물리적 시간이라는 바다에 젖어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 바다를 벗어나 영원의 땅으로 발을 디디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다. 영원이라는 것이 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현실적 열망을 품고있는 것 자체가 인간은 영원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도망가고 아무도 없는 녹조탕에서 황소개구리가 혼자 첨벙거리며 아직 신나게 놀고 있다. 영원한 곳에서 이 놈이 끼일 자리는 없다하더라도 아직은 쫒아내고 싶지 않다. 나는 양다리를 걸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