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원래 이기적인 사람으로 태어난 데다가, 자라면서도 그 이기심은 더 풍성하고 공고해졌다. 일찌감치 중학교 때부터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마음에 깊이 새겼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천상천하 유아독존)’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불교에서는 나름 노력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니 이는 석가모니 뿐만 아니라 개개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은 개개인의 존재 모두가 존엄하다라는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맥락일 것이다. 이 말을 ‘독불장군’ 혹은 ‘자기중심주의’로 풀이한다면 석가모니의 인생과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얕은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때 이 말을 듣고 ‘세상에는 나 밖에 없다’라는 뜻으로 참 진리인 것마냥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은 (보이고 만져지더라도) 아마 꿈처럼 허상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사람들과 우정이나 사랑의 관계를 충분히 맺지 못하고 소외되어 자란 사람들은 아마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모양이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크게 히트를 하는 것을 보면 현대사회가 얼마나 고립된 개인들로 가득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정과 사랑은 환상에서 벗어나 세계를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 어린 시절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애정을 가정과 친구들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다면 빛을 받지 못한 식물처럼 사람의 마음도 시들고 병들어 쉽게 자기중심주의적인 사고에 빠지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교육환경도 이기적인 습성을 기르는 데에 한 몫을 한다. 공부를 잘하려면 인간관계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여 밤을 새워야 했기 때문이다. 성격이 좋아서 주위에 친구들이 많이 꼬이는 애들을 보면 왠지 뒤떨어지고 나약해보이곤 했었다. 점수가 잘 나올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모의고사 점수’는 바람직한 삶의 유일한 잣대였다.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나이 터울이 많아서 독자처럼 자란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형이나 누나와 치고박고 부딪히는 치열함도 없었고, 피를 나눈 사람들 간의 애틋함을 나눌 시간도 부족했다. 늘 고단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돌볼 겨를이 없었지만 대체로 내가 원하는 바를 꺾는 일 없이 무난하게 다 수용해주셨다. 내 주위의 세상은 그리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중심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청소년기의 남자들이 하게되는 자위행위도 이기심을 기르는 데에 큰 몫을 담당한다. 그 행위에 동원되는 신체부위는 다른 성(性)과의 유대를 향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생명을 추구하기 위해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남자아이들은 스스로의 쾌락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그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으로 포장하지만 사실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연 안의 그 어떤 생명체도 이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런 행위가 습관화되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수단 혹은 그 행위의 업그레이드된 대용품으로서 이기적으로 이용하기 쉽다. 어쩌면 돈을 주고 그 쾌락을 사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지거나 몰래 혼외의 은밀함을 나누는 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면 그 대상이 굳이 여성이 아니어도, 여럿이 함께라도,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진다. 성적인 행위에서 ‘자신의 쾌락’이 1번이고 ‘관계’가 2번이 될 때 관계라는 것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만이 남게된다. 관계가 사라진 곳에서는 한 팔로 허공을 휘저어 박수소리를 내려는 것처럼 그 행위는 허무할 뿐이다.
중독도 이기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데에 무시하지 못할 역할을 한다. 굳이 알콜이나 도박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은 쉽게 골프, 테니스, 등산, 낚시, 컴퓨터 게임 등에 중독된다. 배우자를 뒷전에 두고도 뉘우침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취미를 너그럽게 이해해주지 않는 배우자의 속좁음을 탓하며 오히려 우울해한다. 때로는 아이들이 다 출가하면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거나 졸혼이라도 해서 나머지 인생은 하고싶은 것을 맘껏 하며 사는 삶을 남몰래 그려보기도 한다.
사람이 외롭게 태어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길러질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설사 무지와 잘못된 환경탓에 그런 성향이 증폭되어 길러졌다해도, 이제는 늦었다는 생각에 체념해버리고 그대로 남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기심은 범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운명도 아니다.
부부의 관계가 평탄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남편 쪽의 이기심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대체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자랄 때 이기심이 조장되는 그런 조건에 더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부부관계의 개선은 아마도 남편 쪽에서 먼저 자기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고 이기적으로 길러진 사람이라는 것을 도덕적으로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느님이 세상이라는 작품을 창조할 당시 모든 것이 ‘좋았다(good)’하고 자평했으나 유일하게도 사람의 외로움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알맞은 협력자’를 사람의 갈비뼈에서 만들었다. 흔히, 자신의 살과 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신과 동일한 습성을 가질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알맞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정반대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알맞은 협력자’는 나와는 완전히 다르며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움이 되는 사람, 그래서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는 것 또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내 협력자는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해하며 나의 모자란 능력을 보충해줌으로써 나의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착을 포기해야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애할 때는 잠시 나와의 다른 점들이 매력으로 다가왔다가 결혼 후에는 오히려 그 점들 때문에 늘 우울함과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비난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제는 그 다름이 나를 보완해준다는 것을, 아내는 내 ‘알맞은 협력자’임을 믿어야 할 것같다.
‘맺어준다’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멍에를 함께 맨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의 안일함을 방해하는 상대방의 멍에에서 탈출하려고만 하는 그런 이기적인 태도에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데…운명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굳어버린 나의 이기심에서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