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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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칡뿌리 같은 인생’이라고 한다면 신세한탄을 토로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의 칡뿌리에 대한 기억은 참 달콤하다. 친구들과 자주 칡을 캐러 뒷산을 이 잡듯이 헤매곤 했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칡뿌리 만한 간식거리도 드물었다. 뒷산을 헤매는 정성과 경험에 따라 크고 굵으며 즙이 많은 칡을 캐곤 했는데 나는 아쉽게도 가늘고 변변치 않은 것 밖에는 캐지 못했다. 동네 형들이 어쩌다 어깨에 팔뚝만한 칡을 매고 의기양양하게 산을 내려오는 것을 보노라면 어린 마음에 그들은 마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 같았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그 칡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산삼이나 불로초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자라면서 초콜렛, 햄버거, 피자, 양념치킨, 짜장, 짬뽕을 알게 된 후로는 뇌리에서 그 맛이 사라져갔다. 풀밭에 어른 손가락 만한 여치들이 안보이고 여름날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던 논바닥의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요즘에 누가 칡을 씹겠는가. 간식으로 어림도 없다. 통나무 만한 칡뿌리를 누가 가져다 준다 해도 가드닝 쓰레기 버리는 날만 기다릴 것이다. 칡뿌리는 뭔가 함량 미달이다.

사실 그 칡이 가치를 잃은 것은 아니다. 내가 변해버린 것이다. 품위가 생겼나? 그렇게도 귀하고 먹음직스럽던 것이 이제는 볼품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으며 씹을 것이 없어 보인다. 있어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가끔 내 일상이 그렇게 볼품없고 초라하다. 식사준비와 설거지, 식료품 쇼핑, 아이들 라이드, 청소… 캐나다 와서 특히 한 오 년 전부터 얼떨결에 떠안게 된 이런 일들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는다. 널부러진 칡뿌리들 만큼이나 보잘 것 없고 함량미달로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나는 너무 품위가 높아졌나 보다.

칡과는 달리 이런 ‘잡일들’은 애시당초부터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최근에 와서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떠안게 만드는 아내와 아이들을 혼자 살고 싶어질 정도로 원망하던 어느 순간 신비롭게도 아내와 아이들이 칡넝쿨로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삶이라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내가 유일하게 부여잡고 있던 줄이 그들이 아니던가. 평소에 멸시했던 저 칡뿌리들이 넝쿨을 생기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은 스스로를 위해 할 때는 형벌이지만 (뭐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도네이션’으로 생각하고 할 때는 뭔가 축복 같은 면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죄의 대가로 선고 받은 평생의 노동과 자녀를 갖기 위한 산고는 어쩌면 처벌이 아니라 어차피 부러진 팔다리에 부목을 대어주는 것과도 같은, 신의 호의가 아니었을까? 경우에 따라 노동과 산고는 저주스런 에고에서 벗어나는 치유의 통로가 되니까.

그동안 너무 잡일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것이 어쩌면 허무의 시간을 버티게 해주고 생명줄 같은 칡넝쿨을 돋게 해주는 뿌리가 될 소지도 많은데 말이다. 칡을 산삼뿌리나 불로초로 여기던 예전의 그 순진한 입맛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고 지겨운 일상을 거룩하게 생각할만한 영혼의 소양도 나에게는 없지만 그래도 말린 칡뿌리로 차를 우려 천천히 그 향기를 마셔볼 요량은 생겼다. 어쨌거나 애써야 유지되는 일상과 부양해야 하는 자녀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상인의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노동할 수 있는 신체가 있고 아내와 자녀들이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부러운 동경일 수도 있으니까.

‘이놈의 칡뿌리 같은 인생!’. 누가 알겠는가, 어두운 동굴에서 칡뿌리만 먹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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