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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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은 시간, 친구집에 놀러갔던 딸아이를 데리러 아내와 함께 차를 나섰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먼 거리였다. 팬쇼파크웨이 서쪽으로 하이드파크를 지나 한참을 더 갔다. 사방이 캄캄해졌다. 같이 따라왔던 막내가 차의 천장덮개를 좀 열어달라 했다. 하늘에 별이 보인다며 신기해하였다. 그러고 보니 변변한 여행이나 캠핑 없이 막내가 집에 틀어 박혀있은 지도 거의 2년이 되어 간다. 나 또한 별을 올려다본지가 까마득했다. 문득 어린 시절 캄캄한 시골의 밤 위로 또렸한 은하수가 흐르고 주위에는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듯 반짝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닥 따듯한 기억이 많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사진처럼 뇌리에 박혀있는 몇 안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밤… 그 숨막힌 밤을 어떻게 잊을까. 먼지 가득한 추억의 창고에 숨어있는 보물과도 같은 사진이다. 그런 순간을 만났다는 것은 인생의 행운이었다. 나도 모르게 차 위를 한번 쳐다보려고 고개를 들려하니 다들 질겁을 한다. “아빠는 운전에 집중하세요.”

어제 저녁 무렵에는 들을 걷는데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짙고 푸른 가을 하늘이 드러나더니 어슷하게 노란 저녁 햇살 아래 단풍으로 물든 숲과 너르고 완만한 들판의 푸른 잔디가 드러나며 상쾌한 명암이 드리워졌다. 마치 사진 속 풍경에 들어와 있는 듯 취하는 장면이었다. 같이 있던 지인도 어느 충청도 시골 출신이었는데 비슷한 정서를 느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그는 요즘 나름 고민하고 있던 생활 상의 문제를 잠깐 얘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맞아요. 어릴 때에는 딱지와 구슬을 목숨걸고 모으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애를 태웠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관점에서는 어쩌면 모두 쓰레기들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세월이 지나면 모든 애착심이 지나간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런 그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는 어린 시절처럼 여전히 설레는 모양이었다.

내 밖에 있는 위대한 아름다움은 나를 한없이 왜소하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된다. 내가 결코 창작하지 않은 자연의 거대한 경이로움 앞에서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빠져들기도 한다.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살았던 모든 인류의 9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믿었다고 하는 데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결코 창작한 적이 없는 뭔가 거대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접하는 순간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과 함께, 크게만 여겨졌던 자신의 불행은 어느새 별것이 아닌 듯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바하를 들으면 신을 믿게된다.’라는 말이 있다. 바하의 음악 역시 밖에 있는 뭔가 거대한 아름다움을 음표라는 도구로 옮겨온 것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측은하다. 특히 코로나라는 희대의 경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자기의 방이나 집이라는 공간도, 어쩌면 자기 가족 또한 결국에는 ‘연장된 자아’에 불과하다. 자기의 밖의 세계를 경험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 노스욕의 어느 고층 콘도 30층의 발코니에서 한 낮에 바라보는 풍경도 자기 방의 연장일 것이다. 사람들이 지은 콘크리트 빌딩 숲만이 시야의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는 그러한 풍경을 자신의 밖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 또한 사람들이 창조한 인위적 세계에 그냥 갇힌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도시 생활이라는 것은 콘크리트 감옥에 갇혀 동료죄수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삶과 비슷한 모습일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생의 비밀이 담겨있다며 극찬한 책 중에서 ‘욥기’라는 것이 있다. 욥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인생의 고통이란 고통은 모두 겪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흠 없고 올곧으며 신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으나, ‘지가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하며 빈정거리는 사탄의 개입으로 그는 재산을 모두 잃고 가축은 모두 불에 타며, 나아가 사랑하던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모두 사고사를 당하고, 결국에는 자신도 악성 문둥병에 걸리게 된다. 그의 불행을 보고 친구들은 하느님에게 잘못을 빌라고 하지만 불행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끝내 찾지 못하는 욥은 뉘우치기를 거부하고 저항한다. 드디어 절정 부분에서 욥은 신과 대면한다. 그러나 신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열거할 뿐이었다. ‘내가 땅을 세우고 치수를 정하고 주춧돌을 박고 모퉁이돌을 놓고 아침 별들이 환성을 지를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고 육지와 경계를 지우고 아침에게 명령하고 새벽에게 자기 자리를 지시하였느냐? ……’

욥은 존재하는 모든 우주만물을 창조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신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다. 자신의 불행마저도 커다란 섭리의 일부로 겸허히 받아들일 정도로 작아져야만, 이유없는 고통의 시간마저도 하느님의 신비로운 시간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때에만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밖의 만물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며 그래서 신비하고 그래서 때로는 무섭고 그러나 때로는 아름답다. 그 한가운데로 내 불행한 삶의 ‘작은’ 고통들이 던져진다. 당장은 이해하지 못해 괴롭고 절망스러웠던 그 고통들은 내가 창작하지 않은 뭔가 거대한 질서의 왜소한 일부분으로 떠돌다가 소리없이 가라앉는다.

대학 시절 홍천강으로 MT 갔을 때 떠들썩한 밤을 지낸 후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가에 외로이 서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달라고 이름 모를 신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다. 만약에 나의 밖에 있는 그 거대한 신비로움의 실체가 무서운 것이거나 불안한 뭔가가 아니라 사실은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사랑 자체’라고 말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가 현실에서는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그 신학을 한번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 때 문득 들었었다. 그 주장이 정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밤하늘의 황홀함이나 어제 저녁 무렵 들판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외부에 있는 거대한 존재의 정말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 원천이 되는 존재는 사실 더 무시무시하게 아름답다면, 그것이 정말이면, 정말 그렇다면, 대학 시절 그때처럼 더이상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별을 헤는 마음으로 (내 밖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돌아오는 캄캄한 길에 차 안을 둘러보며 별을 헤어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저 멀리 오타와에 넷….. 언젠가는 은하수를 흐르는 내 밖의 저 다른 별들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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