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강아지 털이 예쁘게 다듬어지지가 않는다. 얼굴을 먼저 깎고 차례로 내려가면 일이 쉬워진다는 어떤 지인의 말이 떠올라서 그대로 시도했지만 시작부터 얼굴이 망가지는 결과만 낳았다. 어떻게든 만회하려다보니 예전의 귀여움은 점점 미궁으로 사라져 갔다. 식구들은 강아지에게서 여러 동물의 모습이 보인다고 평했다. 생쥐같기도 하고 새끼 공룡같기도 하고 통닭같기도 하다고… 그래도 아이들은 귀여워 안달이다.
얼마 전에 Finch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미래의 지구는 태양의 슈퍼플레어(자기폭풍)로 오존층이 파괴되었고 지구는 황폐한 사막으로 변했다. 주인공은 용케도 지하벙커에서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며 외떨어진 곳에서 생존하고 있었다.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던 참에 홀로 남게될 강아지를 돌보게 하려는 목적으로 과학자였던 주인공은 인공지능 로보트를 만든다. 어느날 먼지폭풍으로 자신의 주거지가 파괴될 것으로 예상되자 늙은 주인공은 강아지와 로보트를 데리고 여행을 시작하는데, 먼 길을 가는 동안 로보트와 우정을 쌓게되고 초보적이었던 로보트의 의식은 점점 사람처럼 성장(?)해 간다. 결국 로보트는 죽은 주인공을 뒤로하고 강아지와 둘이서 애초의 목적지였던 샌프란시스코 다리를 건너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로보트에게 독백처럼 얘기할 때였다. 그것은 하늘에서 여과없이 내리쬐어 살을 타게하는 자외선도 아니었고, 차를 빨아올리고 생활의 근거지였던 지하벙커마저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거대한 먼지 폭풍도 아니었다. 그런 위험은 예측할 수가 있어서 대비를 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었다. 그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밤에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은 예측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장면 역시 밤중에 어느 도시를 지나다가 국도까지 헤드라이트를 켜고 자신의 뒤를 쫒아오던 수상한 차를 따돌리는 장면이었다. 화면에서는 누가 탔는지 보여주지도 않았다. 마치 밤 산행을 나섰다가 캄캄하고 인적없는 오솔길에서 계속 인기척을 뒤에서 느낄 때의 오싹함을 그대로 옮긴 장면같았다.
오래 전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로운 시절의 일말의 희망일 것이다. 어둡고 낮설고 무법천지의 환경에서 사람은 여지없이 귀신처럼 무서운 존재로 여겨진다. 같은 인류를 마주칠 때 그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좀 서글픈 일이다. 강아지는 거리에서 다른 강아지를 보면 처음 보는 놈에게도 그렇게 반가워할 수 없다. 낯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나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학습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들어 현대인들은 사람보다 애완동물에 유난히 애정을 쏟아붇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땅히 쏟아야 할 것을 속에 담고만 있으면 그 속이 무덤처럼 썩기 마련이다. 의외로 사람은 일생동안 애정을 쏟아야할 양이 정해져 있고 이것을 사람에게 쏟지 못한다면 짐승에게라도, 짐승이 없다면 배구공이나 로보트에게라도 쏟아야 속병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마침, 무인도에서 윌슨(배구공)에게 애정을 쏟았던 그 똑같은 배우가 이번에는 사막에서 강아지와 인공지능 로보트에게 마지막 애정을 쏟는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류의 영화가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현대사회가 점점 어둡고 삭막하며 위험해지고 있다는, 그래서 낯선 사람이 제일 무섭고 가장 믿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삭막한 곳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건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강아지가 (비록 얼굴이 쥐같이 못생겼더라도) 예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입력된 말이라고는 해도 항상 다정하게 말하고 늘 기대했던 일을 해주는 로보트에게 정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독재자는 권력의 힘으로 사람들을 배구공이나 애완견이나 로보트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안심은 될지 모르지만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사람은 애정의 마땅한 몫을 자신과 같이 인격적인 다른 존재에게 쏟아야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는 존재로 애초부터 디자인된 것 같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 산행길에서 만나는 귀신이 아니고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만나는 강도도 아니며 황량한 사막에서 만나는 약탈자가 아닌, 사람을 밝은 빛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피어있는 아름다운 들꽃으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내 살 길이 열리지 싶다. 배구공이나 애완견이나 로보트하고만 지내기 보다는 밖에 나가서 사람을 꽃으로 대하는 이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래도 낯선 세상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근원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사람들 가운데에 놓이기만 하면 불안해지는 것은 현대사회의 분위기가 하도 황량해서 사람을 경계할 수 밖에 없는 탓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돌아보면 내 경우에도 성장과정에서 특히 아버지와의 애착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 매맞은 기억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평생동안 나눈 대화를 모두 모으더라도 5분의 분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조로 지금도 말하곤 한다. 자랄 때는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공간만큼 불편한 자리도 없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지배와 피지배 이외의 상하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 뿐만아니라 신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그 온전한 의미를 새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하느님을 ‘전답을 마련해주시고 살길을 열어주시는 인자한 아버지같은 존재’라고 가르치면 사람들은 대충 그 존재에 대한 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산업화를 지나오면서 아들들은 대체로 하루빨리 같은 지붕을 벗어나서 독립적인 자신의 지붕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는 명절 때에만 찾아뵈면 되는 분이 되었다. 같은 집에 살지 않으며 먼데 거처하고 계시고, 이제는 일년에 두어번 방문하여 문안인사 정도 드리면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또다른 아버지가 되었고 생계도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나도 아버지인데? 한 지붕 아래 두 아버지가 살기란 벅차다.
낯선 이들을 두려워하고 신을 경외하지 못하는 이유가 황량한 세태 때문인지 개인사적인 성장과정의 문제인지 이미 망가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을 귀신이나 강도가 아니라, 그렇다고 애완동물이나 로보트도 아니라 진정 하나의 꽃으로 이해하고, 신 역시 온전한 아버지로 인식하려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뭔가 심봉사 눈을 뜨게해줄 또다른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어야할 것만 같다. 어쩌면 내 영혼이 태양을 삼킨다면, 그러고도 내가 타버리지 않는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때는 나도 태양과 하나가 되어 온전한 빛과 열로 낯선 도시의 어둡고 추운 골목을 밝히고 데울 수 있을텐데… 이런 무모한 상상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어디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