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도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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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시킬 결단을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는데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있다면 영을 체험한 것이다.>

독일 신학자 칼라너의 ‘일상’이라는 책 일부인데,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너무나 보기 힘든, 어리석은 삶의 자세이다.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법정스님도 참으로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깊은 산중이 아니라 속세에서 바둥거리는 내가 떠안을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부담 때문에 한번도 그 책을 펼친 적이 없다.
과연 나는 일상에서 바둥거린다. 냉장고를 살펴서 시장을 보거나 도시락과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일, 그리고 집안 청소하고 아이들 라이드 하는 것, 아내의 자질구레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육체적으로 버거운 노동이라서 그랬던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이민 와서 너무나도 변화된 위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감정을 도네이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대개의 경우 노숙자에게 동전을 도네이션할 때는 마음에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 그 행위에 대해서 나중에 보답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받은 사람이 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가지건 그렇지 않건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그 동전을 어디에 쓰건 상관이 없다. 그냥 잊어버리고 만다. 현대인들은 감정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데도 속으로 용을 써서 참아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마음 속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쓰레기통 크기가 다를 뿐이지 언젠가는 가득 차서 통이 넘어진다. 그러니 감정 노동을 통하여 쓰레기를 마음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그 쓰레기를 아예 화학적으로 바꾸어 보약으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어쩌면 노동(행위와 감정)을 상대방에게 도네이션 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은 안팎으로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고통(toil)으로 느껴지는 것은 하는 일이 열매도 없고(fruitless) 의미도 없을 때(pointless)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노동을 도네이션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큰 금액을 도네이션 하지는 않는다. 작은 동전부터 조금씩 도네이션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재산의 반이나 전부을 도네이션하는 일도 생기듯이, 가사일이나 자녀 돌봄이나 아내의 부탁 들어주기 등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면 나중에는 어쩌면 생계로 하는 일을 포함하여 나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노동을 도네이션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은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로 남을 위해 노동할 때 비로소 열매와 의미를 수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거나 많이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진정한 부자에게 왜 기쁨이 없겠는가!

변화된 일이 힘든 것은 내가 하기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살펴서 거기에 의미와 열매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노동은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 기쁨이 없고 인내하기만 해야하는 고통(toil)이 된다. 노동을 통해서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살핀다면, 그리고 그러한 도네이션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건 안되건 그가 그것을 고마워하건 하지 않건 이후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만 있다면 쓰레기가 보약으로 바뀌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행위건 감정이건 자꾸 도네이션 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뭔가 뜻밖의 것을 돌려받는다. 고인 물은 썩지만 비운 옹달샘에는 다시 신선한 물이 고이듯이 무소유로서의 삶에는 반드시 금전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자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혜택이 마음에 고인다. 금전적인 무소유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생활상의 크고 작은 감정 노동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도네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산속이 아닌 곳에서 일상을 사는 나도 어쩌면 수줍은 의미에서의 ‘성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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