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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을 원숭이와 뱀과 새를 데리고 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데리고 갈래요? 배낭이 있어요.”

뜬금없이 아내가 묻는다. 나 하나 돌보기도 힘든 그런 환경에서 왜 굳이 그런 동물들과 동행을 해야 하나 싶어 몇 번이나 ‘정말 꼭 데리고 가야 돼?’ 하고 물었지만 심리 테스트니까 꼭 그래야 한단다. 그냥 할 수 없이 데리고 갔다. 뱀은 위험하니 주둥이를 묶어 배낭에 넣고 새는 왼손에 살포시, 그리고 원숭이는 오른손으로 마주잡고 간다고 했다. 알고 보니 뱀은 재물, 원숭이는 배우자, 새는 자녀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안한 ‘정글’에서 다들 내 맘 같지 않은 짐승들과 같이 가는 방법을 상상할 때 재물과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평소의 태도가 은근히 배어나는 모양이다.

뱀이 재물을 상징한다고 하니 흥미롭다. 뱀은 아무래도 위험하고 혐오스러우며 두렵기도 하고 왠지 사악할 것 같기도 한 이미지이다. 도저히 길들일 수 없을 것 같고 시간이 가도 내 편이 될 것 같지 않은 존재이다. 아주 어렸을 때 뒷산 중턱 산딸기 수두룩한 곳에 산딸기 따먹으러 올라간 적이 있는데 똬리를 튼 뱀이 초입에서 목을 곧추 세우고 나를 노려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뱀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은 ‘의인화’ 하기가 힘든 생김새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일반적인 동물들은 팔다리가 있어서 쉽게 사람처럼 그릴 수가 있는데 뱀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혐오감 때문에 심지어 사악한 존재로 취급 당하다니 뱀에게 만약 자의식이 있었다면 생김새 때문에 당하는 모욕에 상당히 억울하였을 법하다.

재물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친해지지 않고 차가우며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혐오스럽고 때로는 사악해 보여서 피하고 싶지만 꼭 데리고 가야 하는 그 무엇?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이런 뱀같이 위험한 재물을 길들여 가까이 두고 싶어한다. 재물이 없이는 정글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을 통과하기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못생긴 사람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잘생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통장의 잔고가 늘 부족하고 매달 나가는 요금과 비용 때문에 마음 졸이는 사람들은 여름마다 자녀들을 데리고 해외여행 다니는 이웃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한다. 그러나 못생긴 것과 잘생긴 것은 아이가 자라서 넓은 세상을 만나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함을 알게 되듯이, 살다 보면 하루 세 끼니만 먹을 수 있는 처지와 한 달 내내 해외 여행 갔다 올 수 있는 여유 역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성경에는 ‘만나’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국경을 극적으로 이탈한 후 새 정착지로 향하는 여정에 들어서기는 했는데 가는 길이 광야라서 길바닥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 그 때 아침마다 이슬처럼 천막 주위에 맺혔던 희한한 먹을 거리가 주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만나’이다. 그런데 당시 피난민 신세라 그런지 불안한 마음에 하루치 이상을 모아서 보관하면 꼭 썩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두 달은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그것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러나 결국 그 이주민 1세대가 다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그들은 그 음식을 먹었다. 만약 그들이 음식을 확보하고 곳간을 증설하는 데에만 인생을 허비했다면 그들은 아마도 왜 탈출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근처에 정착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목마를 때는 싱크대 물 한 컵이면 족하다. 굳이 사이다나 주스를 마실 필요는 없다. 좋은 집에 살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자녀가 공부 잘해서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유럽 여행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어쩌면 물 대신 주스를 마시는 것과 같지 않을까? ‘천년도 하루 같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백세이다. 백세 동안 모아서 남는 재물은 하루를 지난 만나와 같은 것일 게다. 그냥 하루치, 또 하루치의 식량만 계속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정글이든 광야든 지나갈 수가 있다.

그러고 보니 막내의 태몽은 내가 꾸었는데 시커멓고 커다란 뱀이 나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뱀이 부유함을 가져다 주기는 하나보다. 막내로 인해 어릴 때 놓쳤던 산딸기 같은 열매를 매일 실컷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뱀이 가져다 주는 부유함이란 나의 노력이 아닌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꾸준히 취할 수 있다는 뜻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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